전통적으로 태국인이 예술을 바라보는 방식은 기능성과 관련되어 있었다. 기능적인 것이 곧 아름다운 것이고, 예술가는 곧 공예가였다. 기능적인 물건을 더 아름답게 만들 수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통적인 미학적 관점의 범위에서만 허용되었다. 아름다움을 위해 기능성이 희생된다면 누구도 그 사람의 바구니나 코코넛 분쇄기를 사지 않을 것이다.
태국에는 르네상스가 없었고, 따라서 형태에 대한 평가와 감상에 있어서 뚜렷한 변화의 시기가 없었다. 태국인들은 부처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사원을 짓고 장식했다. 문과 덧문에는 모두가 알아볼 수 있는 익숙한 신화 속 인물들이 조각되었다. 건축가와 화가, 조각가, 작곡가, 무용가, 가수, 작가들은 모두 공예가이며 교육자였다. 그들은 작품을 만들거나 공연을 하고 기술로 인정받았지만 스스로를 창조자라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작품에 이름을 달지 않았다. 그들은 변화가 아닌 연속성의 도구였다. 태국 예술은 재료와 기법, 수단이 변함에 따라 뺌이 아닌 더함에 의해 발전했다. 아주 최근까지 순수 공예가 완벽함의 본질로 받아들여졌으며, 우리 세대에 와서야 태국의 미술은 일상적인 노동이나 종교 생활과 분리되어 기능성 없이도 의미 있는 존재로 독보적 위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불교 건축
불교는 8세기부터 인도 남부와 스리랑카에서 지역의 전통예술과 함께 태국으로 들어왔다. 초기 불교 사원은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북동부로 관광객을 꾸준히 끌어들이는 사원들처럼, 대체로 기존 애미니즘 건물들 속에 자리 잡았다. 이는 당시에 종교적 변화가 비적대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새로운 종교가 기존 종교를 상당 부분흡수 통합했음을 암시한다.
이후 불상을 모시는 특징적인 본당과 높이 솟은 지붕, 그리고 시암에서 발견된 주요 언어들과 흡사한 다양한 문자로 쓰인 패엽경을 보관하는 별도의 서고 건축 등을 특징으로한 독특하고 새로운 사원 양식이 발전했다. 우본랏차타니에 있는 유명한 왓 퉁시무앙의 서고는 지붕이 여러 층이며, 건물이 연못 위에 떠 있는 구조다. 사원의 중요한 자료를 보관하는 서고 건축물은 이처럼 보안을 위해, 그리고 소중한 원고들을 개미와 그밖에 책을 좋아하는 다른 것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지면에서 먼 고상 가옥 형태로 지어졌다. 이런 건물들은 경전과 읽고 쓰는 능력에 대한 태국인들의 존경심을 반영한다.
불상을 모시는 봇(본당)의 내부와 불상 자체는 매우 정교한 것부터 마을 사람들이 지은 소박한 것까지 다양하다. 돌로 만든 오래된 형태의 사원들이 여전히 존재하며, 많은 경우 관광 목적으로 복원되었다. 오래된 왓(사원) 중에 여전히 사원으로 기능하는 곳은 비교적 소수다. 이는 사람들이 공덕을 쌓는 주된 방법으로 새 사원을 지을 돈과 노동력을 보태고 있기 때문이다. 태국 사람들은 오래된 사원을 보존하느라 애쓰기보다는 차라리 새 사원을 짓는 것을 선호해 낡아서 비가 새는 사원을 허물고 그 자리에 똑같은 사원을 짓곤 한다.
몇몇 예외는 있지만 신축 사원은 기존 사원의 양식을 그대로 따른다. 다양한 크기와 양식으로 지어진 많은 불상들도 마찬가지다. 돌이나 나무를 깎아 만들었건, 청동이나 철을 성형해서 만들었건, 전통적인 불상은 몇 가지 정해진 양식 내에서 그 윤곽을 따른다. 불교 건축에 있어 형태의 혁신은 권장되지도, 금지되지도 않지만 그다지 좋게 평가되지 않는 편이다.
사원들의 벽과 지붕 내부, 기둥은 석가모니의 삶이나 고대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와 종종 민간 설화의 장면을 묘사하는 벽화들로 채워져 있다. 오늘날 미술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훈련의 일환으로 이 벽화들을 모사한다. 이것이 전통을 이어가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새로운 형태의 표현이 발전하는 것을 저해한다는 의견도 있다.
민속 예술
태국의 민간 예술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기능적인 물건들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기능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거나 기술 발전으로 인해 똑같은 일을 더 빨리 해낼 수 있는 수단이 도입되면 물건들은 버려지거나 새로운 등가물로 교체되었는데, 새로운 물건은 당연히 미학적 측면이 부족하거나 더 이상 사용자가 아닌 생산자가 만들어낸 대량생산의 가치에 걸맞은 것들이었다.
끄라따이kradai(‘토끼’)는 코코넛 강판을 뜻하는 말이다. 토끼 모양으로 만든 전통적인 강판 모양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이 아름답고 기능적인 도구는 20세기 중반에 주로 사용되었으며 내구성이 좋아 집, 가축, 전답 등과 함께 대물림되었다. 농부가 토끼 등에 앉아 토끼 입에 달린 금속 강판으로 코코넛을 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쌀을 빻으면서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기계로 코코넛을 갈기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한 시간의 힘든 노동이 필요했을 일을 기계 두 대가 몇 분 만에 해냈다. 손으로 코코넛을 가는 농부가 줄어들면서 옛 물건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었고, 똑같이 기능적이지만 덜 미학적인 현대식 끄라따이로 대체되었다. 옛날 물건 중 소수는 골동품 상점으로 갔지만 대부분은 버려지거나 땔감이 되었다. 이와 비슷하게, 대형 바퀴를 달고 뒤에 코끼리가 새겨진 소달구지도 똑같은 운명에 처해 석유를 동력으로 하는 트럭으로 대체되었다. 오늘날 박물관 밖에서 살아남은 제품들은 민속 예술품으로써 좋은 값을 받고 있다.
민속 예술은 의류 제작으로도 확대되었다. 사람들이 입는 옷은 타이족을 비타이족과 구분 짓고, 보다 큰 차원의 ‘태국인’ 정체성 내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즉시 식별해내게 했다. 20세기 이전까지 태국 비단은 중국 비단, 고급 도자기와 마찬가지로 귀족들의 전유물이어서 태국 내에서 널리 사용되지 못했다. 20세기 중반만 해도, 특히 북부와 북동부 마을에서는 농민들이 고상가옥 아래에 베틀을 두고 직접 천을 짜서 옷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 풍경이었다. 이미 많은 의류가 대량생산되어 만드는 것보다 사는 편이 경제적이었지만, 여성들은 계속해서 농한기에 타이족의 정체성을 표시하는 ‘씬(sinh)’ 치마를 손수 짜서 입었다.
20세기 중반까지 태국 가정에서 발견되었을 법한 거의 모든 물건이 민속 예술에 해당한다. 당시엔 옷을 옷걸이에 거는 방식이 아니라 개켜서 보관하기 위해 선반이 달린 장식 옷장이 필요했다. 여성들이 바닥에 앉아 머리를 손질하는 낮은 화장대, 가족들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 등나무나 나무로 만든 ‘깐똑’ 밥상, 그리고 티크나 다른 단단한 목재를 조각해서 만든 패널 벽 등이 대표적이다. 이제는 골동품에 향수를 느끼는 중산층 가정에서나 그런 물건을 찾아볼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역시 매우 이례적인 경우이며, 대부분 가정에서는 태국판 이케아 조립용 가구를 사용한다.
품질 좋은 목재가 부족해짐에 따라 대안들이 더 빨리 나왔고, 대량생산 시스템이 사용자를 제작자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옷이며 각종 생활도구, 이불, 장신구, 아이들이 날리는 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직접 만들거나 공예가에게 주문하는 것보다 사는 편이 더 싸고 쉬워졌다. 미학은 여전히 집단의 영향을 받지만(이웃이 좋아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좋아한다) 이제 그 집단의 취향이 전국의 시청자에게 TV로 광고되는 대량생산 제품들의 영향 아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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