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하늘에서 굽어보면 베네치아를 관통하는 대운하 카날 그랑데(Canal Grande)는 마치 흘러가는 물음표 같다. 그것은 구불구불 덧없이 세월 속을 흐르며 인간의 흥망성쇠와 함께했다. 그리고 죽음, 공포, 고립, 초현실적 요소가 충만한 해상도시의 복잡한 어제와 오늘을 만들어냈다.
중세 시대부터 바다는 이 도시에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부를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세속적이면서도 잔혹하고 허영심 강한 성격은 이 도시에 호방함과 낭만을 부여했다. 도시의 화려한 치장, 사치스런 술자리, 어지러운 불꽃, 장중한 축제는 모두 깊고 풍부한 추억과 감동을 남겼다.
베네치아. 아드리아 해상에서 찬란하게 반짝이는 보석과도 같은 이곳은 긴 세월에 걸쳐 창작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기묘한 빛을 발산하고 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저마다의 베네치아가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은 베네치아를 새롭게 해석하려 한다. 하지만 나는 베네치아가 너무 익숙해서인지 운치 있는 골목이나 화려한 건물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그저 세월의 흐름 속에만 존재하는 베네치아다.
“그것은 이름도 없고, 장소도 없다. 내가 다시 한 번 당신에게 그곳을 설명하려고 하는 이유는……”
이탈리아 문학가 칼비노(Italo Calvino, 1923-1985)는 베네치아를 주제로 그 다양한 요소를 다시금 해석했고 더 나아가 화려한 묘사로 도시와 인생의 매력을 설명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도시들 중에서 구성 요소를 연결하는선, 내재적인 법칙, 그리고 관점과 논리도 없이 존재하는 도시를 배제해야 한다. ……도시는 꿈과 같으므로 무엇이든 상상하거나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예상치 못한 꿈이나 이룰 수 없는 꿈에는 욕망이 숨겨져 있고 꿈 자체가 공포를 숨기고 있는 수수께끼일 수도 있다. ……또한 우리는 도시가 우리의 정신과 기회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는다. ……도시는 꿈과 수수께끼, 욕망과 공포로 구성된다.”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칼비노는 몽골 황제 쿠빌라이 칸과 베네치아 청년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 사이에 발생한적 없는 허구의 대화를 소개한다. 문학가들은 마르코 폴로의 허구적인 이야기를 아랑곳하지 않고, 역사학자들은 마르코 폴로가 동양에서 보고 들은 것이 진짜인지, 심지어 그의 존재 여부조차 심각하게 의심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탈리아 사람들은 마르코 폴로의 업적을 인정한다. 1982년 6월 1일 발행된 1,000리라는 비잔틴, 이슬람, 고딕 스타일의 건축물인 ‘베네치아 총독궁’을 배경으로 로마의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Galleria Doria Pamphilj)이 소장한 마르코 폴로의 초상화를 주제로 삼았다. 심플한 지폐 도안에는 전 세계인들에게 익숙한 베네치아의 이미지가 담겨 있다. 망망대해와 사막을 표류했던 여행자 마르코 폴로는 훗날 지폐의 주인공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지폐의 주인공인 된 사실을 의외로 생각할 사람이 또 있다. 마르코 폴로와 마찬가지로 베네치아 출신인 르네상스 회화의 대가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90-1576)다. 1975년 발행된 20,000리라 지폐에는 티치아노와 그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지폐의 주제 선택만으로도 상당히 깊은 의미를 지녔다.
현재 보르게세 미술관(Galleria Borghese)이 소장한 〈천상과 세속의 사랑〉(1515)은 티치아노가 서거하고 100여 년 후 후대 사람들이 제목을 붙인 것이다. 화가는 르네상스 시대의 기이한 책 《폴리필로의 꿈(Hypnerotomachia Poliphili)》에서 창작 영감을 받았다. 마치 애정 소설처럼 보이는 이 책은 내용이 매우 난해해 이해하기 힘들고, 비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한 문체로 가장 지루한 주제를 논한다. 신성하고 경건한 종교적 사랑과 감각기관의 향락을 위한 세속적인 탐닉, 과연 둘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티치아노는 《폴리필로의 꿈》을 읽은 후 종교적 사랑과 세속적 사랑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 양자 간에는 도덕적 대비가 명확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천상과 세속의 사랑〉을 감상하며 작품 속의 누가 세속 혹은 신성을 대표하는지 분분한 의견을 펼친다. 분명 티치아노는 이처럼 정신적 소모가 심한 추상적 문제를 그림을 감상하는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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