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 기간 없이 담당자가 되다
회사에 신입으로 들어가면 수습 기간이 있습니다. 이 기간에 선배들이 하는 일을 지켜보며 쉬운 일들을 하나씩 시작하고, 점점 맡는 일의 비중이 커지며 한 사람의 몫을 해내게 됩니다. 경력직으로 새 직장에 입사해도 인수인계를 받는 기간이 있습니다. 직전 담당자가 당일에 말도 없이 퇴사하는 어처구니없는 경우가 아니고서는 짧게라도 거치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일에 적응할 마음의 준비운동을 합니다. 제 육아에 그런 시기가 있었나 돌이켜봅니다. 없던 것 같습니다. 모자동실을 쓰며 바로 담당자가 되었지요. 조리원이든 도우미든 가족이든 누군가의 도움을 받던 조리 기간이 수습 기간이 될지 모르겠으나 저에게는 모자동실을 경험한 충격이 수습 기간 없이 담당자가 된 걸로 느껴지게 합니다.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직장이라면 사표라도 낼 수 있지, 종신 직원 당첨입니다. 아이와 헤어지고 싶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직장인 줄 몰랐다는 것. 다들 권하며 거기 언제 들어갈 거냐고 묻기만 했던 직장이었다는 거지요.
처우는 열악합니다. 일단 월급은 없고, 정부에서 주는 양육수당 10만 원은 딱 기저귓값입니다. 출퇴근 시간도 따로 없고 주말 연차도 없는 풀타임 재택근무. 대화를 나눌 동료도 없습니다. 상사인지 고용주인지 모를 높으신 분은 울음으로 모든 것을 지시하고 칭찬 한마디 하지 않습니다. 아, 상사라면 적어도 일을 가르쳐주고 힘든 일도 함께하니, 아이는 고용주인가 봅니다. 월급도 안 주면서 24시간 부려먹고, 복지라고는 가뭄의 단비처럼 보여주는 웃음이 다입니다. 저는 바보처럼 그게 또 좋다고 사르르 녹아 남은 시간을 버텨냅니다. 그런데 고용주를 같이 흉볼 동료는 없는데 왜 그리 감시자는 많은지. 까다로운 높으신 분 비위 맞춰 먹이고 있노라면 누군가가 나타나 이래라저래라 말이 많습니다. 씻지도 못하고 높으신 분 챙겨 나가면 ‘더워 보인다, 추워 보인다’ 말을 얻습니다. 직장인들의 낙인 점심시간? 없습니다. 일하며 허겁지겁 먹거나, 그분의 낮잠 시간(그러고 보니 유일한 이 일의 복지네요)에 숨죽여 먹거나. 이러나저러나 체할 것 같고, 늘 배가 고픕니다. 그 혹은 그녀가 조금 일찍 잠든 늦은 저녁 “앗싸! 내 세상이다” 하고 주린 배를 뒤늦게 채우면 살은 찌고 운동할 시간은 없습니다. 고용주가 낮잠이나 밤잠을 자지 않으려 하면, 저는 그나마 있는 복지혜택을 빼앗길까 매우 전전긍긍하며 고용주를 압박합니다. 그거라도 없으면 저녁 근무 못 한다고요…
이쯤 되니 제대로 설명도 안 해주고 이 직장을 ‘강추’라며 이끈 이들에게 어이가 없어집니다. 다들 경험했으면서 말이죠. 경력 증명서에 한 줄도 쓰지도 못할 경력을 쌓느라 이력서의 공백이 길어져 가는 게 보입니다.
새근새근 잠든 그분의 안위와 적정 발달만이 내가 이 직장에 필요한 이유이자 이 직장에서 원하는 전부라고, 그것이 경력 몇 년이 줄어드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나 자신을 위로합니다. 아니, 혼자 무엇이든 버텨내는, 온전히 한 사람 곁을 매일같이 지키며 살아내는, 내 인생에서 만난 가장 어려운 일을 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이 일을 통해 내가 강해지고 있는 바로 그 지점일지 모르겠다고, 역시, 스스로 위로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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