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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같은 파도는 다시 오지 않아>

07. 그런 게 바보라면 나는 기꺼이 바보가 되겠어.

by BOOKCAST 2022.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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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일을 하는 동안, 그리고 회사를 운영하면서 나는 가끔 시험에 든다. 특히 내가 해외 생활을 시작할 당시에는 거래를 하는 사람에게 선물이나 사례금을 주는 것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던 때였다. 그중 홍콩은 중국의 전통적 문화를 지키고 있으면서도 영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 비즈니스 매너와 지역의 관행이 혼재되어 있었다. 이를 동과 서가 만났다 하여, 쭝시합빅(中西合璧)이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그러다 보니 붉은 봉투에 돈을 넣어 주는 문화가 있고, 오래 두고 쌓은 친분을 뜻하는 꽌시(系关) 문화도 강력하게 남아 있다. 회사에서 비즈니스로 만난 사이라도 기념일이나 특별한 날에 선물이나 상품권을 주고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번은 내가 만난 거래처 직원이 작은 사례라며 봉투를 건넸다. 나는 으레 주고받는 구두 상품권이거나 백화점 상품권일 것이라 생각하고 웃으며 선물을 받았다. 이런 작은 선물을 주고받는 건 문화일 뿐더러, 거절하면 오히려 무례로 여겨지기 때문에 받는 일이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봉투를 건넨 그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후에, 나는 봉투를 열어 보았다. 거기엔 무려 삼천만 원이 들어 있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다. 이렇게 큰돈을 선물로 받아 본 건 처음이었다.

‘이걸 왜 나에게 준 거지? 우리 회사에 뭘 원하는 거지?’ ‘이걸 내가 받았다고 뭔가를 요구하면 어떻게 하지?’ ‘거절할 기회도 없었는데 혹시 돌려줄 타이밍을 못 잡으면 어쩌지?’ 나는 반사적으로 계단을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뛰어 내려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그보다 빨리 도착해야 한다는 마음에 정신없이 내달렸다. 내 구두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헉헉거리며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차 문을 여는 그가 보였다. 나는 겨우 그를 따라잡았다.

“봉투에 삼천만 원이 들어 있었어요.”
“네, 압니다. 김차장님께 드리는 거예요.”
“저한테요? 저한테 왜요?”
그는 헉헉거리며 봉투를 들고 뛰어 내려온 내가 오히려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뭘 부탁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관례죠. 다른 분들도 다 받았어요. 전임자도 받았는데요.”
“그래도 삼천만 원은 너무 크죠. 저는 이거 못 받아요. 이 돈 안 받아도 현재 재주문 들어오고 있는 것들 업체 변경 없이 그대로 다 드려요. 걱정 마세요.”
“이거 저 돌려주신다고 해도 소용없어요. 제가 중간에서 대신 가져가도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일단 저는 못 받습니다. 하시고 싶으시면 다른 업체처럼 십만 원 구두 상품권 정도로 해 주세요.”


지하 주차장에서 우리는 봉투를 두고 옥신각신했다. 나는 떠맡기듯 그에게 봉투를 건네고 돌아섰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삼천만 원은 정말 큰돈이었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다 받는다는 그의 말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에겐 그 정도 돈에 유난을 떠는 내가 더 이상해 보였을 수도 있다.
가끔 생각한다. 그때 그 돈을 받았으면 어땠을까? 아마 그 돈이 문제가 될 확률은 낮았을 것이다. 그 돈을 받지 않았다고 친구들은 내게 바보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난 그래도 내 자식에게 떳떳한 사람이고 싶어.”
“요즘 애들은 떳떳한 부모보다 돈 많은 부모가 더 좋다고 하던데?”

그런 농담을 하며 우리는 자주 웃는다. 그런 게 바보라면 나는 기꺼이 바보가 되겠다. 그건 내가 특별히 정직한 사람이라거나, 도덕적인 사람이어서는 아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부당한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 그런 것이 나를 버티게 해 준 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올바름에 대한 문제라기보다는 나의 존엄에 대한 문제였다. 나의 존엄은 삼천만 원에 팔아 버리기에는 너무 값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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