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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본삼국지 3>

05. 거슬러서 차지하고 부드럽게 지킨다

by BOOKCAST 2022.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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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에게 가려던 촉나라, 
유비에게 가다 5 (마지막 회)

 

유장이 황권과 왕루를 물리치고 떠나보내니 법정은 형주로 가서 유비에게 글을 올렸다.
‘집안 아우 유장은 두 번 절하고 종친 형님 현덕 장군 휘하에 글을 올립니다. 높으신 성함을 들어 모신 지 오래이나 촉의 길이 험해 미처 선물을 보내지 못해 몹시 황송하고 부끄럽습니다. 이 장이 들은 바로는 친구는 길흉을 만나면 서로 구하고, 환난을 겪으면 서로 돕는다고 했으니 하물며 종친끼리는 어떠하겠습니까? 장로가 북쪽에서 아침저녁으로 군사를 일으켜 경계를 침범하려 하니 이 장은 몹시 불안합니다. 삼가 글을 올려 귀한 귀에 사연이 들어가게 하니 만약 종친의 정을 생각하시고, 형제의 의리를 온전하게 하시려면 바로 군사를 일으켜 적을 쓸어 없애주시기 바랍니다. 영원히 입술과 이가 되면 마땅히 후한 사례를 드리겠습니다. 글로 다 말하지 못하니 오로지 전차와 군마를 기다립니다. 종친 아우 장이 올립니다.’
 
유비는 글을 읽고 크게 기뻐 잔치를 베풀어 법정을 대접했다. 술을 몇 순 마신 뒤 유비가 사람들을 물리치고 가만히 말했다.
“오랫동안 효직의 뛰어난 이름을 우러르고, 장 별가가 공의 높은 덕성을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가르침을 받게 되니 평생의 위안이오.”
 
법정은 겸손하게 대답했다.
“저는 촉의 자그마한 벼슬아치이니 어디 말할 나위나 있겠습니까? 대체로 듣자니 좋은 말은 훌륭한 조련사를 만나면 울부짖고, 사람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면 목숨을 바친다고 합니다. 장 별가가 지난날 드린 말씀에 장군은 아직 뜻이 있으십니까?”
 
유비가 대답했다.
“이 비는 남의 땅에 몸을 붙이고 손님 노릇을 하면서 서글퍼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소. 일찍이 생각하니 자그마한 굴뚝새도 나뭇가지 하나에 의지하고 교활한 토끼마저 굴 세 개에 몸을 숨기는데, 하물며 사람이겠소? 촉의 부유한 땅을 손에 넣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유계옥이 비의 종친이라 차마 공략할 수 없을 뿐이오.”
 
“익주는 하늘이 내린 곡창으로 난리를 다스리는 주인이 아니면 거느릴 수 없습니다. 유계옥이 현명한 이를 쓰지 못해 기업은 오래지 않아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는데, 오늘 스스로 장군께 드리려 하니 기회를 놓쳐서는 아니 됩니다. ‘토끼를 쫓으면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逐兎先得축토선득]’라는 말도 듣지 못하셨습니까? 장군께서 촉을 차지하시겠다면 죽음을 무릅쓰고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유비는 두 손을 모으고 고마움을 나타냈다.
“만약 하늘이 준다 하더라도 실은 공이 나에게 내리는 것이니 잠깐 쉬시고 앞으로 더 상의하도록 해주시오.”
 
술상이 끝나 제갈량이 친히 법정을 배웅해 역관으로 돌아가고 유비가 홀로 생각에 잠겨 있는데 방통이 충고했다.
“일을 결정해야 할 때 결정하지 못하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주공께서는 고명하신 분인데 어찌 의심이 많으십니까?”
 
“공이 보기에는 어떻게 해야 하겠소?”
 
“형주는 거칠어져 쓸쓸하고 인물들이 다 사라졌는데, 동쪽에는 손권이 있고 북쪽에는 조조가 있어 뜻을 펴기 어려운 고장입니다. 익주는 호구가 100만에 이르러 땅이 넓고 재물이 많아 대업을 받쳐줄 수 있습니다. 다행히 장송과 법정이 안에서 도우니 이는 하늘이 익주를 주공께 내리는 것인데 무엇을 더 의심하십니까?”
 
유비가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지금 나하고 물과 불처럼 싸우는 자는 조조이니 조조가 급하게 굴면 나는 너그럽게 움직이고, 조조가 폭력을 행사하면 나는 어질게 행동해야 하오. 조조가 속임수를 쓰면 나는 충정을 내세우며 때마다 다르게 해야 일이 이루어지오. 만약 자그마한 이익 때문에 천하 사람들에게 믿음과 의리를 잃는다면 나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겠소.”
 
방통이 빙긋이 웃었다.
“주공 말씀은 하늘의 도리에 어울립니다만 난리에서 군사를 부려 상대를 이기려면 갖가지 방법이 있으니 한 가지 도리만 옳은 것이 아닙니다. 보통 이치에만 얽매이면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으니 적당히 임기응변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약한 자를 아우르고 어리석은 자를 공격하며[兼弱攻昧겸약공매], 거스르는 수단으로 차지하고 바른 방법으로 지키는 것[逆取順守역취순수]’은 탕왕과 주무왕의 길입니다. 일이 정해진 후 유장을 의롭게 대해 큰 곳을 나누어주면 믿음을 저버리는 게 무엇입니까? 오늘 차지하지 않으시면 바로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니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약한 자를 아우르고 어리석은 자를 공격하며’는 《상서(尙書)》 <중훼지고>에 나오는 말로 ‘다른 나라의 힘이 약하면 삼키고, 정치가 혼란하면 군사를 풀어 공격한다’는 뜻이다. ‘거스르는 수단으로 차지하고 순한 방법으로 지키는 것’은 《한서(漢書)》 <육가전>에 나오는 말이 약간 다듬어져 생겼다. 한 고조 유방이 천하를 차지한 뒤 육가가 그 앞에서 《시경》과 《상서》를 높이 평했으나 원래 글을 싫어하는 유방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는데 무슨 놈의 《시경》과 《상서》를 따지느냐?”
 
“말 위에서 얻었다고 어찌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육가가 날카롭게 반박하면서 탕왕과 주무왕의 선례를 들었으니, 천하를 차지할 때는 무력을 쓰지만 다스릴 때는 어루만지는 수단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탕왕은 임금인 걸을 무력으로 뒤엎고 주무왕은 천하의 주인인 주를 갈아치웠는데, 걸과 주가 폭군이라 하여 탕왕과 주무왕의 행위는 반역으로 인정되지 않고 오히려 길이 칭찬받았다.】
 
방통의 말이 걱정을 시원하게 풀어주어 유비는 문득 깨달았다.
“솥에 써넣고 비석에 새겨 후세에 길이 전할 좋은 말씀이니 가슴 깊이 간직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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