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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경영/<서재에서 탄생한 위대한 CEO들>

07. 막후의 실세, 찰리 멍거(버크셔 해서웨이 부회장)는 어떤 책을 읽을까?

by BOOKCAST 2022.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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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스마트해지려고 노력한다.
내가 노력하는 거라곤
호구가 되지 않는 것뿐이다.
대부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의외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_찰리 멍거

 



찰리 멍거는 1924년 1월 1일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Omaha)에서 태어났다. 비범한 인물은 태어나는 타이밍조차 기가 막히다. ‘오마하의 현인’ 워렌 버핏보다 여섯 살 많았다. 그가 오마하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말 만들기를 좋아하는 호사가들의 좋은 소재가 되었다. 그는 십대일 때 버핏의 할아버지가 소유한 자그마한 식료품 가게였던 버핏앤드선(Buffett & Son)에서 하루 열 시간 일하고 일당 2달러를 받는 노동 착취(?) 수준의 알바를 하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변호사였고 할아버지는 지방법원 판사이자 하원 의원이었다. 멍거라는 성(姓)은 독일어로 ‘상인’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아마 그 집안에서 멍거만큼 자신의 성을 충실히 살았던 인물은 드물 것이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한다. 그의 투자 감각은 어렸을 때부터 빛을 발했다. 그가 처음 시작한 사업은 굳이 이름을 갖다 붙이자면 축산업이었다. 일곱 살 때 햄스터를 길러서 동네 아이들에게 웃돈을 받고 파는 비즈니스를 벌인 것이다. 우리로 따지자면 학교 주변에서 코흘리개 아이들에게 병아리를 파는 아저씨들의 사업 감각을 이미 멍거는 그 어린 나이에 습득한 셈이다. 그는 평범한 십 대를 보내고 미국의 일류대학인 미시건대학교에 입학했다. 전공은 수학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수학은 현실과 동떨어진 따분한 학문이었다. 1943년 초,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때, 자신의 열아홉 번째 생일을 보내고 며칠 지나지 않아 그는 대학을 중퇴하고 미 육군 항공대에 입대했다. 본래 세계 이곳저곳에서 온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로서 민족주의라는 것 자체가 없었던 미국에서 진주만 공습은 미국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 시기 전쟁에 대한 미국 젊은이들의 위기감과 애국심은 영화 「진주만」을 보면 잘 드러나 있다. 어쨌든 멍거 역시 학교를 마치는 것보다 입대하여 나라를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전쟁은 그에게 인생의 두 가지 터닝포인트를 선사했다. 하나는 첫 번째 아내를 만나게 된 일이었다. 그는 군사훈련을 받고 알래스카에 주둔했는데, 거기서 아내 낸시를 만났다. 다른 하나는 이상만을 쫓던 그가 가정을 꾸리며 현실 감각을 갖게 된 것이다. 그는 군인으로 있으며 캘리포니아 주 패서디나에 있는 칼텍에서 기상학을 공부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았는데 이는 그의 삶에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이후 기상학을 공부하는 와중에 멍거가 아버지의 모교인 하버드대학 로스쿨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로스쿨의 입학처장은 멍거가 학부 과정을 다 마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음에는 입학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학장은 전 하버드 법대 학장이자 멍거 가족과는 친구로 지냈던 로스코 파운드로부터 전화를 받은 후 멍거의 조건부 입학을 허가했다. 우리나라나 미국이나 아빠 찬스는 위력을 발휘한다! 그것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는지 멍거는 로스쿨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고 1948년에 법학사 학위를 받고 우등으로 졸업했다. 하버드대학교에서 그는 하버드 법률지원국의 일원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대학과 육군에서 포커를 배웠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멍거는 버핏처럼 샌님(?)은 아니었던 것 같다. 우리에게는 포커가 화투에 버금가는 사행성 도박의 하나쯤으로 여겨지지만, 사실 포커는 매우 통계적이고 수학적인 게임이다. 오늘날 포커의 기술은 대부분 금융권과 주식 투자에서 활용하는 통계학 이론들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배워야 할 것은 승산이 없을 때 일찍 죽고, 큰 우위를 갖고 있다면 베팅으로 든든히 지원사격을 하는 겁니다. 그런 기회는 자주 오는 게 아니니까요. 물이 들어왔을 때 노를 젓는 겁니다. 전 이 중요한 기술을 포커에서 배웠습니다.”

로스쿨을 졸업한 그는 가족과 함께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여 라이트 앤개릿이라는 로펌에 입사했다. 그는 회사에서 초봉으로 275달러를 받았다. 당시로서 꽤 괜찮은 월급이었으나 멍거는 남의 사업이나 자산을 자문해 주는 변호 업무에서 갈증을 느끼곤 했다.

멍거의 첫 번째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1953년, 아내인 찰리 낸시와 ‘화해할 수 없는 성격 차이’로 이혼하고 만다. 위자료를 내준 멍거는 거의 파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불행은 항상 겹쳐서 온다. 그의 8살 된 아들 테디가 급성 백혈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멍거는 당시 의료보험도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모든 비용을 현금으로 지불해야 했다. 매일 그는 다른 두 아이들을 돌보고 변호사 일을 하면서 테디의 치료를 위해 병원을 오가는 삶을 살았다.

“저는 아들이 침대에 누워 천천히 죽어가는 걸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불 속에 있는 그를 꼭 안아 주고는 병원을 나서서 패서디나 거리를 울면서 걸어가곤 했죠.”

결국 테디는 멍거의 각별한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아홉 살이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들의 죽음으로 삶의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가정은 이혼으로 깨졌고, 그는 파산했다. 이때 심정을 멍거는 이렇게 회상한다.

“인생은 기회비용의 연속입니다. 손쉽게 찾을 수 있고, 자신과 가장 어울리는 사람과 결혼해야 합니다. 이는 투자 대상을 찾는 일과 흡사합니다.”

인생의 밑바닥에 발을 디딜 때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 온다. 1956년, 그는 동료 변호사의 소개로 두 명의 자녀를 둔 낸시 배리 보스웍(헐, 이번에도 낸시다!)이라는 돌싱과 재혼을 하며 새로운 가정을 꾸린다. 그의 나이 32세였다.

오성과 한음, 백아와 종자기, 사다함과 무관, 관중과 포숙처럼 친구로 인해 자신의 역량을 뛰어넘는 존재로 성장할 수 있게 해주는 우정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오늘날의 멍거도 버핏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1959년, 드디어 멍거는 버핏을 처음 만난다. 이미 오마하에서 두 가문은 매우 가까운 사이였지만 버핏과 나이 차이가 났던 멍거는 35년을 기다려서야 하늘이 점지한 친구를 만날 기회를 만난 것이다. 원래 버핏의 초기 투자자 중 한 사람이었던 에드윈 데이비스라는 외과의사는 당시 버핏의 투자 전략을 듣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은 멍거라는 친구와 똑같은 이야길 하는군요. 한 번 만나보시겠습니까?” 그렇게 둘은 오마하의 한 디너파티에 참석했는데, 둘은 만나자마자 바로 화학적 결합을 했다. 버핏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첫눈에 그를 이해했죠. 그를 보자마자 내가 좋아할 만한 사람이란 걸 알았습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멍거 역시 버핏의 비범함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저 그런 인상을 받은 게 아니었습니다. 그에게서 아주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버핏은 그 자리에서 멍거에게 투자가가 변호사보다 더 빨리 부자가 될 수 있다고 권유한다.

자잘하게 주식 투자를 병행하고 있던 터라 투자가 매우 흥미로운 일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멍거는 자신의 이름을 딴 법률회사를 만들고 싶었다. 1962년, 그는 멍거톨스앤올슨이라는 법률자문회사를 세우고 거기서 부동산 전문변호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회사는 기업 소송과 증권, 노무, 반독점법, 세법, 부동산, 신탁 등 다양한 분야를 다루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와 영부인 이멜다의 은닉 재산을 회수하기 위한 정부의 소송을 맡은 것으로 유명하다. 3년 뒤인 1965년 멍거는 변호사보다 투자가가 부자가 되기에 더 유리하다는 버핏의 제안을 잊지 않고 미련 없이 회사를 떠난다. 조부와 부친이 대대로 일구어 온 법조계를 나오는 데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음은 물론이다. 당시 이유를 두고 멍거는 이렇게 말했다. “재정적으로 완전한 독립을 원했기 때문이죠. 전 누군가에게 소송장을 보내는 일을 고귀하지 않은 일로 여겼습니다. 어디서 비롯된 생각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은연중에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지요.”

당시 그는 이미 여러 건의 부동산 투자와 주식 투자로 상당한 돈을 만지고 있었다. 이후 멍거는 버핏과 10년 동안 함께 투자를 진행하다가 1976년 정식으로 버크셔 해서웨이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이야기는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것과 같다. 개인적으로 투자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필자는 버핏과 멍거의 우정에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적 아니면 도둑놈 천지인 이 바닥에서 저렇게 오랫동안 우정을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 둘의 서재가 이를 증명해 주지 않을까? 멍거는 사석에서 이런 말을 종종 했다고 한다. “제 평생 책을 꾸준히 읽지 않는데도 똑똑한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이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워렌과 제가 얼마나 많은 책을 읽는지 알게 된다면 깜짝 놀랄 것입니다.” 과연 멍거의 서재에는 어떤 책들이 꽂혀 있을까?


멍거의 서재에 꽂혀 있는 책들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청아출판사)』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을유문화사)』

리처드 도킨스, 『눈먼 시계공(사이언스북스)』
재레드 다이아몬드, 『총, 균, 쇠(문학사상)』
재레드 다이아몬드, 『제3의 침팬지(문학사상)』
존 그리빈, 『딥 심플리시티: 카오스, 복잡성 그리고 생명체의 출현(한승)』
그레고리 주커먼, 『The Greatest Trade Ever』
로버트 G. 핵스스톰, 『워렌 버펫 포트폴리오(나무와숲)』
윌리엄 N. 손다이크, 『아웃사이더(아이지엠세계경영연구원)』
레스 슈왑, 『Pride in Performance』
로렌스 M. 크라우스, 『무로부터의 우주(승산)』
지노 세그레, 『A Matter of Degrees』
허버트 A. 시몬, 『Models of My Life』
앤드류 S. 그로브,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부키)』
개럿 하딘, 『Living within Limits: Ecology, Economics, and Population Taboos』
벤저민 프랭클린, 『벤저민 프랭클린 자서전(원앤북스)』
매트 리들리, 『생명설계도, 게놈: 23장에 담긴 인간의 자서전(반니)』
아서 허먼, 『How the Scots Invented the Modern World』
프랭크 파트노이, 『FIASCO: 파생금융상품 세일즈맨의 고백(길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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