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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이번에는 붙을 수 있을까>

01. 취업열차 마지막 탑승객

by BOOKCAST 2022.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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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엔 보통 같은 반 친구들끼리 친하기 마련이지만, 나는 고1, 2 때 한 번도 같은 반이 된 적 없는 친구들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우리는 각 반의 반장으로서 학생회 활동을 하며 희로애락을 공유해서인지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우리의 인연은 생각보다 오래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 여섯 명은 우연히도 문과 세 명, 이과 세 명이다. 대학도 서울, 진주, 통영, 부산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졸업 후 타지에 취업하면서 자주 만나기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인연이 끊어지지 않고 오래가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도 종종 놀라곤 한다.

 

당연하게도 이과 출신 친구들이 취업 스타트를 끊었다. 이과 출신인 만큼 전공도 기계, 임상병리, 건축 등 다양했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순서대로 취업 소식을 전해왔다. 반면 문과생 세 명은 하필 더 취업하기 어렵다는 법학, 교육학, 사학이었다. 우리의 취업이 늦어진 만큼 이과생들의 취업턱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취업을 일찍 한 죄로, 취업을 잘한 죄로 매번 만날 때마다 계산하는 이들은 바로 이과생이었다.

 

문송합니다라는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우리 문과생들은 취업이 늦었고 당연하게도 셋 모두 공시생과 고시생이었다. 공무원, 교육행정직 그리고 임용. 일 년에 한두 번밖에 없는 시험이라 합격이 쉽지 않았고, 결국 1년이 2년이 되고, 2년이 3년이 되고 있었다. 공부한다는 이유로 한 번 모이는 것도 어려웠다. 문과생 셋이 한창 공부할 때는 1년에 한 번도 겨우 만나곤 했다.

 

그러다 A가 공부한 지 2년째 되던 해 서울에서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렇게 기쁠 수 없었다. 고시든 공시든 공부를 함께 했던 입장에서 친구의 합격 소식은 너무나도 반가웠다. 그해 나는 경기도로 임용을 응시했던 터라 잠깐이지만 같이 윗지방에서 살아보자며 서울·경기 생활을 함께 꿈꾸기도 했다. 다른 문과생 B는 처음에는 영어 임용을 준비하다가 교육행정직으로 진로를 바꿔 새롭게 공부를 시작했다. 함께 임용을 공부할 때는 비록 과목은 달랐지만 동지라는 생각에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고민도 공유하곤 했는데, B가 교육행정직으로 진로를 변경한 후에는 그게 어려워졌다. 그래도 이따금 도서관에서 함께 공부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곤 했다. 그러다 B 역시 공부를 시작한 지 2년째 되던 2019년 여름, 합격 소식을 전했다. B가 하루빨리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던 터라 합격 소식을 듣고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축하해...! 고생했어...!”

 

나는 아직 겪어보지 못한 감정이었지만, 마치 내 일인 것처럼 기뻤다. 한편으로는 나만큼 오래 공부했던 친구라 부럽기도

했다. 연락처에서 B의 번호를 찾는 동안 나만 남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추가 내 마음을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역시 내가 제일 마지막일 것 같더라니라는 후련함이 들기도 했다. 함께한 지 10년이 지난 만큼 우리는 서로의 아픔과 슬픔을 알고 있었고, 내가 마지막이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아니, 사실 그렇게 생각하려고 마음을 고쳐먹은 건지도 모르겠다. 부러움과 후련함, 내려놓음이 공존했고, 그래서 복잡했다. 내가 공부를 제일 오래 했는데, 왜 나는...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는 의문이 내 머릿속을 채웠다.

 

반면 이과생 세 명은 사회생활을 일찌감치 시작했다. C는 늘 나에게 전화해 어딘데, 나온나라는 말로 시작했다. 쾌활한 성격을 가진 C는 공대 출신의 어엿한 대리님이었다. ‘나 공부하고 있어라는 대답은 씨알도 안 먹혔다. ‘공부는 맨날 한다이가. 나온나.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게.’ 이 말에 11시까지 할 공부를 9시에 접고 도서관을 나선 적도 있었다. 도서관 출근 복장이라 후줄근한 추리닝에 도시락이 담긴 백팩을 메고, 안경을 쓴 채 그렇게 서면으로 나갔다. 핫하다는 술집에 앉아, C가 권하는 술도 얼마나 튕겼는지 모른다. 나는 항상 내일 공부해야 해서라고 말했고, C한 잔만 마셔라라 대답했다. 그 한 잔을 얼마나 나누어 마셨는지. 하지만 그런 잔소리들은 서운한 축에도 끼지 못했다. 오히려 1차는 당연히 직장인들이 계산하는 그런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 그저 미안할 뿐이었다. 술 먹자는 말에도, 술 한 잔만 마시라는 말에도 그렇게나 튕겼는데, C는 여전히 전화해서 어딘데, 공부하나라고 묻곤 했다.

 

취업이 가장 빨랐던 D는 휴학 한 번 한 적 없었고, 대학 시절에도 실습실에서만 살던 친구였다. 치열하게 살았던 만큼 취업 역시 제일 빨랐고, 돈도 우리 중에 제일 많이 썼을 것이다. D는 기억도 못할 일이겠지만, 만나서 실컷 놀았던 어느 날 D에게 만원을 빌린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엔 돈이 없어 나중에 갚는다고 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직장이 부산인지라 D와 가장 자주 만났고, D는 아무렇지 않게 늘 자기가 계산했다. ‘됐다, 보람아. 내가 살게. 다음에 사라.’

 

E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고, 대전에 취업하게 되면서 더욱 만나기 어려워졌다. 그래도 서로가 서로에게 잊힐 때쯤 꼭 한 번씩 전화가 와서 함께 수다를 떨곤 했다. 보통 공부가 끝나고 도서관을 나서면 집까지 15분 정도 걸렸는데, 통화는 15분을 훌쩍 넘어 30분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다들 어떻게 지내는지 E에게 건너 듣기도 했다. E가 두세 달에 한 번씩 해주는 전화는 되려 무척 고마웠다. 딱히 내가 하는 이야기보다 E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더 많았지만, 그래서 때로는 빨리 끊고 싶었던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 전화 한 통으로 우리가 이어져 있음을, 여전히 나를 응원하고 있는 친구들이 있음을 느끼곤 했다.

 

공부하는 동안 제일 힘들었던 순간은 친구 부모님의 부고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직장인 친구들에게 밥을 얻어먹는 것도, 약속을 미루는 것도 미안한 일이었지만, 부고는 제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종류의 소식이었다. 어느 것도 쉽게 위로가 되지 않았을 테지만, 재정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다른 친구들만큼의 여유가 없다는 상황이 내가 공부하고 있는 이 현실을 뼈저리게 자각하게 해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밤을 새우며 함께 있어 주고 싶었고, 몇 번이고 전화해 만나자며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내일도 모레도 공부해야 하는 불투명한 미래를 살고 있는 나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의 상황을 이해해주고, 공부하는 와중에 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하는 친구들은 나에게 늘 미안함과 고마움의 대상이었다.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할 때도 매번 만날 때마다 세상 공부 혼자 다 하냐며, 그렇기 때문이라도 너는 될 수밖에 없다며, 볼멘소리와 응원, 위로가 뒤섞인 농담이 서운하기보다는 고맙기도 했다. 한 해 한 해 시간이 쌓일수록, 내가 불확실한 미래에 불안해할수록, 나보다 더욱더 내 미래를 확신하는 친구들 덕에 나는 다시금 책을 펼치고 펜을 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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