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시험을 치렀다. 이번 해만큼은 앞선 두 번의 시험보다 더 노력했다고 확신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새벽기도에 다녀온 후 간단히 밥을 먹고 7시쯤 도서관으로 향했다. 열람실에 1등으로 도착해 창문을 열고 사물함에서 책을 꺼내 착석하면 보통 7시 30분. 그렇게 남들보다 이르게 하루를 시작했다. 앞의 두해보다 더 노력했고, 사람들도 덜 만났다. 천재가 아닌 내가 할 수 있는 건 시간 싸움, 엉덩이 싸움이라고 생각했고, 그 정도로 노력하면 당연히 될 거라 확신했다.
1차 합격자 발표 날. 애써 찾아보기를 미루던 그때 1차 합격을 축하한다는 교육청의 문자를 받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때가 돼서야 안심한 채 합격자 조회 사이트에서 결과를 확인했다. 결과는 불합격.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부랴부랴 교육청에 전화했고, 안타깝게 공립 1차는 불합격이지만 사립 1차에 붙었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온탕과 냉탕의 연속이었다.
공립 임용만 따졌을 때 결과는 0.2점 차로 1차 낙방. 내 눈앞에서 문이 닫혔다. 하늘은 아직 나를 버리지 않았는지, 당시 공립과 사립에 동시 지원을 했던 터라 사립의 한 재단에서 2차 수업 실연과 3차 면접을 볼 기회가 생겼다. 이미 문자 한 통으로 짧은 시간에 여러 감정을 느낀 상태였지만 공립 1차에서 떨어진 것에 좌절감을 느끼고 속상해할 시간이 없었다. 여전히 사립 2차라는 한 번의 기회가 있었고, 그 기회를 잡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많이 공정해졌다고는 하지만 사학 재단은 내정자가 암암리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공·사립 동시 지원인 만큼, 1차에 임용고시 점수를 반영한 것이니 당연히 기회는 공평하다고 생각했다. 또 내정자가 있다 하더라도 임용고시 성적이 반영되는 만큼 내정자가 떨어지고 초임교사나 다른 응시교사가 붙기도 한다는 기분 좋은 사례들도 있었다. 기간제 경험이 전혀 없었기에 붙기 어려울 것 같다고 앓는 소리를 하는 시간마저 아까웠다. 후회할 수 없다는 일념으로, 3:1 경쟁률이면 한번 해볼 만하다며 마음을 다잡고 몇 주간의 특훈이 이어졌다.
첫날은 수업 실연, 둘째 날은 면접이었다. 특성화고인 만큼 나의 경쟁자들은 두 분 모두 남자 선생님이었다. 수업지도안 작성을 앞두고 평가관을 기다리며 앉아있는데, 딱 봐도 나보다는 연륜이 있어 보이는 두 분이 들어왔다. 여기서 1차로 현실 자각 타임. 연륜이 있어 보인다는 말은 기간제 경험이 많다는 뜻이며, 경험이 없는 나는 한참 뒤처진 채 시작한다는 걸 의미했다. 불안감이 몰려왔지만 그래도 나는 신규로서 풋풋함과 열정이 있다고, 누구보다 수업 실연에 자신이 있다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웬걸, 경쟁자이자 후보자인 두 분이 아주 편하게 담소를 나누는 장면을 목격했다. 여러 학교에서 기간제 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관계이겠거니 하며, 설마 내가 생각하는 최악은 아닐 거라 애써 믿었다.
뽑기를 통해 수업 실연 주제를 선택했다. 내가 고른 주제는 ‘조선 전기의 사회 모습’이었다. 많고 많은 주제 중에 하필 조선전기의 사회 모습이라니. 이렇게 재미없고 뻔한 주제라니. 순간적으로 갈피를 잃었지만 다시금 정신을 가다듬고 기간제 연수에서 배웠던 다양한 수업 기법을 떠올렸다. 주어진 유의사항 종이를 접은 후 보석 맵을 만들어 학생 중심 수업으로 실연했다. 결과는 나름 만족. 퇴장을 도와주셨던 나이 지긋한 선생님은 나보고 경험이 많냐며 아주 잘했다고 격려의 말까지 전했다. 경력이 있는 선생님들 사이에서 이 정도면 선방했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순수한,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었다.
1차 수업 실연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와 지원했던 학교의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그곳에 소개된 역사 선생님 두 분의 이름을 보니, 문득 대기실에서 들었던 선생님 두 분의 이름이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동일 인물이었다. 순간 눈앞이 아득해졌다.
‘아 나는 들러리였구나.’
내정자 한 명을 뽑기 위한 자리도 아닌, 두 명의 기간제 선생님 중 한 명을 정교사로 뽑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는 생각에 허무해졌다. 내정자가 한 명만 있어도 그분을 제치고 될까 말까 한마당에 두 분 모두 그 학교의 기간제 교사였다니. 한 명의 티오가 내 자리일 가능성은 없었다. 생각해 보면 그런 조짐은 늘 있었지만, 내가 모른 척, 못 본 척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사립이라도 필기 최저 점수는 공개하는데, 당시 내가 지원했던 학교는 점수를 공개하지도 않았다. ‘수업 참 잘하시네요’라는 얘기는 위로의 말이었던 게 분명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수업 참 잘하시네요. 수업 많이 해보셨어요?’라는 말에 위안 삼아 울며 겨자 먹기로 다음 날 면접을 준비했다.
면접 당일 내가 면접관으로부터 가장 먼저 들은 말은 질문이 아닌, ‘여기에서 떨어진다고 해도 선생님의 자격이 모자라거나 미흡해서가 아닌...’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결코 아니었으면 했던, 내가 들러리였음이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애초에 공정하거나 공평한 자리가 아니었다. 물론 기간제 경력이 중요한 사립 2차에서 내가 두 분에 비할 수 없지만 적어도 있는 그대로 봐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건 꿈일 뿐이었다. ‘경험 없이 어느 학교에 합격했데’라는 희망찬 소식들은 말 그대로 희망일 뿐,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이제야 맞이한 현실 자각 타임. 공립 1차에서 0.2점 차로 떨어졌다는 사실. 열심히 준비했던 3주간의 시간이 아무 의미가 없었다는 사실은 그제야 뼈아프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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