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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이번에는 붙을 수 있을까>

05. 왜 자꾸 선조를 인조라고 말씀하셨어요? (마지막 회)

by BOOKCAST 2022.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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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에 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다음 날에 예정된 수업 실연을 준비해야 했다. 부산의 경우, 어느 단원에 있는 내용을 어떤 형태의 수업을 할지, 관련된 조건이 함께 담긴 문제를 보고 60분 동안 지도안을 작성해야 한다. 그리고 20분의 구상 후 20분 동안 수업 실연을 진행해야 한다. 수업 실연에는 한국사 부분만 나온다고 알려져 있었기에, 한국사의 고대부터 근현대사까지, 어느 시대에서 어떤 내용이 나올지 모르니 한국사 전 시대의 지식을 머릿속에 담고 있어야 했다.
 
우선 고대부터 근현대까지 전 단원을 다시 한 번 모두 떠올려 보고 싶었다. 전 단원을 차근차근 판서하며 설명한다고 가정하고 시뮬레이션을 하기 시작했다. 딱 고려까지 해보고 나니 까마득히 남은 단원들마저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현대사는 건들지도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최대한 나올 가능성이 큰 부분을 우선 해보기로 하며, 나름 꾀를 부렸다. 첫 번째 실수였다.
 
임진왜란은 나오기 힘들 것 같으니 눈으로 살짝 보고 넘어 가야겠다
 
효율적으로 시간을 쓰기 위해 나올 법하거나 혹은 잘 외워지지 않거나 설명하는 게 부자연스러웠던 단원을 먼저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비교적 쉬웠던 부분은 대충 머릿속으로 그려보기만 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가족을 대상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러 개의 지도안을 던져놓고 동생이 고른 지도안으로 수업 실연을 했다. 병자호란 당첨. 특히 전쟁사를 가장 까다롭게 여겼기에 가족들 앞에서 무탈하게 하면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모님과 동생 앞에 서서, 큰 달력 뒷면을 칠판 삼아 수업을 했다. 이때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설명하면서 얼마나 인조를 외쳤겠는가. 그것이 두 번째 실수였다.
 
대망의 수업 실연 당일. 우선 수업지도안을 작성하는 시간이 주어진다. 문제지를 받고 조건에 맞추어 해당 차시에 맞게 수업지도안을 작성하면 되는데, 이 과정이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수업에 활용할 수 있는 건 사료와 학생 활동 내용, 그리고 지도안 조건이 전부였기 때문에 긴장 속에서 해당 단원에 대한 지식을 다 꺼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수업지도안에 주어진 조건이 제대로 지켜 졌는가, 실제로 수업을 실연할 때 지도안에 쓴 것들을 그대로 실연해냈는가도 점수에 반영된다고 하니 무조건 길고 거창하게 쓸 수도 없었다.
 
내가 원하는 단원이 문제로 나오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문제로 나온 단원은 바로 임진왜란이었다. 수업 실연 전날, 안 나올 것 같다며 가볍게 보고 지나쳤던 그 임진왜란 말이다.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나를 원망하며 숨을 골랐다. 문제 역시 작년도 문제와 다르게 까다로웠다. 매해 새로운 유형의 문제가 나오긴 했지만, 왜 하필 내가 이 자리에 있을 때 까다로운 문제가 나온건지. 심지어 단순히 한국사 속의 임진왜란만을 말하기보단, 동아시아에서 임진왜란이 가지는 의미에 초점이 맞추어진 듯했다. 또한 이때까지 보지 못한, 역사과 핵심역량과 관련하여 학생들을 평가하는 부분을 쓰는 것도 있었다. 나만 당황한 게 아닐 테니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지도안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문제는 임진왜란의 3대 대첩을 써야 하는 조건이 있었는데, 세 가지 중 한 가지가 지독하게 기억이 나질 않았다. 한산도대첩, 진주대첩을 쓰고, 답이 아닌 귀주대첩만 머리에 빙빙 돌고 정작 정답인 행주대첩이 생각나지 않았다. 장장 5년 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알고 있던 답이 죽어도 기억이 나지 않는 순간이었다. 어쩔 수 없이 3가지 대첩 중 2가지만 쓸 수밖에 없었다. 어제 제대로 볼 걸, 절로 탄식이 나왔다.
 
구상시간이 끝난 후 문제지와 지도안을 다 거두어갔다. 이를 대비해 가져간 빈 지도안에, 내가 썼던 지도안을 까먹기 전에 그대로 옮겨 적었다. 이후에는 교과서를 볼 수 있었기에 부랴부랴 해당 부분을 확인했다. ‘행주대첩...! 이런 바보! 멍청이!’ 속으로 자책하면서도 이미 지나간 건 어쩔 수 없다며 이제 수업을 어떻게 실연해낼 것인가에 대해 구상하고 그리기 시작했다.
 
일단 어떻게 판서할 건지 노트에 그려보았다. 그리고 내가 쓴 지도안 내용 중에 어느 부분이 실연 조건으로 나올지 모르기에, 지도안에 쓴 전개 1, 전개 2, 전개 3 모두 시뮬레이션하기 시작했다. 보통 2개의 전개로 묶어 실연 조건이 주어지기에, 전개 1과 전개 2, 전개 2와 전개 3, 전개 1과 전개 3, 이렇게 세 가지 경우 모두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수업 실연에 20분이 주어졌기에 어느 부분이 나오더라도 20분 안에 모든 것을 보여줘야만 했다.
 
다행히도 수업 실연 순서는 14번째였고, 이 말은 나에게 4시간 정도의 시간이 있다는 걸 의미했다. 눈을 감고 되뇌며 다듬고 또 다듬었다. 시뮬레이션을 할 때마다 시간이 초과해 이런저런 말을 빼보기도 했고 판서 스타일도 여러 번 바꿔보기도 했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만큼 점심을 먹어도 괜찮았지만 입맛이 없어 바나나와 초코바로 대충 허기를 달랜 후 장장 4시간 동안 긴장 속에서 시뮬레이션을 했다. 한 명씩 한 명씩 교실을 나갈 때마다 가슴이 더 빠르게 뛰었다. 시간이 점점 다가왔고, 화장실에 가서 복장도 단정히 하고 립스틱도 다시금 발랐다. 하던 대로 하자, 잘할 수 있다, 열심히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어느새 내 차례가 다가왔다. 구상실에 들어가 실연 조건을 확인했다. 어느 부분을 실연할 건지와 실연할 때 꼭 보여주어야 하는 장면들이 조건으로 제시되었는데, 다행히 나올 거라 예상했던 부분이 그대로 나왔다. 임진왜란을 설명하고 모둠 토의 과정과 발표 후 평가까지. 수업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모두 평가하겠다는 의미로 보였다. 대략 10분 동안 머릿속으로 마지막 시뮬레이션을 했다. 평소 연습할 때도 말이 빠르다는 피드백을 많이 들었는데, 실연 조건을 모두 충족하려면 말 속도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수업 실연 시작하겠습니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평가위원들과 눈을 맞추며, 마치 실제 학생들 앞에서 수업하는 것처럼 아는 지인들의 이름을 죄다 부르며 수업 실연을 진행했다.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게 수업 실연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이상으로 수업 실연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수업 실연은 55초를 남기고 끝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빼먹지 않고 큰 실수 없이 시간 내에 다 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평가실을 나오는 와중에 응시생을 안내해주셨던 선생님 한 분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선생님~ 경험이 많으신가 봐요. 정말 잘하시네요.” 그 말에, 그래도 내 수업이 그리 어색하게 느껴지진 않았던 거 같아 안도했다. 하지만 선생님의 다음 한 마디에 깜짝 놀랐다. “그런데 왜 자꾸 선조를 인조라고 말씀하셨어요?” 이게 무슨 소린인가. “? 제가요? 제가 인조라고 말했나요?” 나의 치명적인 세 번째 실수였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어제 가족 앞에서 병자호란에 대해 수업 실연을 해보면서 신명 나게 인조를 외쳤던 탓일까. 나도 모르게, 잘못되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 채 선조를 인조라고 당당하게 말했던 것이다. 그것도 도움 주시던 선생님께서 직접 말씀해주시지 않았다면 몰랐을 일이었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 나 완전 망했다. 정말 이런 바보 같은 실수를 하다니. 그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아 손이 덜덜 떨리기까지 했다. 이 시험에서 떨어진다면 나는 평생 이 순간을 후회하고, 아무 죄 없는 인조를 원망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2차 수업 실연을 보기 좋게 망쳤다. 4~5년 동안 닳고 닳도록 공부하고 외우고 했었는데도, 긴장한 탓인지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을 잊어버렸고, 선조를 인조라고 하는 명백한 실수를 했다. 특히 1차 점수가 높지 않던 탓에 누구보다 완벽했어야 하는 나의 2차 수업 실연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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