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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얄팍한 교통인문학>

07. 시계, 탈것의 이야기를 담다.

by BOOKCAST 2020.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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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이 필수품이 된 세상에서 시계는 시간을 알려주는 본래의 기능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이제 시계는 패션 소품이자 착용한 사람의 취향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었다. 시계산업의 흥미로운 점은 각 제품마다 자신이 지나온 시간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시계가 간직한 이야기는 디자인이나 성능 못지않게 구매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다. 시계가 불필요한 시대, 우리는 시계가 아닌 그것이 태엽처럼 풀어냈던 시간을 구입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시계 속 이야기 중에는 교통수단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 시계산업은 선박, 기차, 자동차, 비행기 등 여러 교통수단의 발전과 더불어 정확성을 향한 도전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인류 최초의 시계는 해시계나 물시계처럼 자연의 현상을 응용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17세기 중반에 진자를 활용한 기계식 시계가 발명되었고, 산업혁명 이후 장거리 여행이 크게 증가하면서 보다 정확하고 휴대가 간편한 시계가 만들어졌다. 특히 철도교통의 확산은 시계의 폭발적인 수요를 이끌면서 시계산업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시계들은 대부분 태엽을 사용한 기계식 시계였으며, ‘탈진기(escapement)’라는 부품이 핵심이었다. 이 부품은 태엽이 규칙적으로 천천히 풀리도록 하는 장치로, 이를 이용해 기계식 시계는 시·분·초 단위의 시간을 일정하게 표시할 수 있었다. 원래 시계는 숙련된 장인에 의해 수작업으로 생산되었기 때문에 귀족이나 부유층만 소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량생산과 부품의 규격화를 통해 점차 일반인들도 시계를 손쉽게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항해를 위한 마린 크로노미터

 

항해에서 사용하는 시계를 흔히 ‘마린 크로노미터(marine chronometer)’라고 부른다. 이것은 18~19세기 유럽을 중심으로 실제 항해사들이나 해군 장교들이 사용했던 특수한 시계였다. 바다에서 시계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경도를 확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시차를 계산해 경도를 파악했고, 따라서 정확한 시계가 필수였다. 하지만 바다는 기계식 시계가 작동하기에 매우 열악한 환경이다. 높은 온도와 습기, 파도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선체는 시계의 내구성과 정확도를 크게 떨어트렸다.

 

 

 


이에 영국에서는 정확하고 견고한 해상용 시계를 제작하는 사람에게 큰 현상금을 내걸었다. 상금은 무명의 시계기술자 존 해리슨(John Harrison)에게 돌아갔다. 그가 제작한 시계는 바다의 수많은 악조건 속에서도 정확하게 작동했고, 훗날 유럽 전역에 마린 크로노미터 열풍을 일으켰다. 마린 크로노미터를 대량생산해 세계 각국에 공급한 곳은 스위스의 율리스 나르덴이었다. 이곳에서 제작된 마린 크로노미터 회중시계는 전 세계 50여 개국 해군에 납품되는 등 큰 인기를 얻었다. 지금도 율리스 나르덴은 이 시계에서 영감을 얻은 다양한 손목시계를 제작하고 있다.

유명 시계제조사 IWC 역시 ‘포르투기저(portugieser)’라는 항해 관련 시계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다. 이 시계는 1939년 포르투갈 출신의 두항해 사업가가 IWC에 고도의 정밀함을 갖춘 포켓워치를 주문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오늘날 IWC를 대표하는 모델로 자리 잡았다.


하늘을 나는 파일럿의 로망


먼 거리를 비행해야 하는 파일럿들에게도 시계는 필수품이었다. 최초의 손목시계도 파일럿의 손목 위에서 탄생했다. 1904년 프랑스의 루이 까르띠에(Louis Cartier)는 자신의 친구이자 조종사인 알베르토 산토스 뒤몽(Alberto Santos-Dumont)의 부탁을 듣게 된다. 비행 중에도 손쉽게 시간을 볼 수 있는 시계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브라질 출신의 비행사였던 산토스 뒤몽은 라이트 형제와 더불어 비행술의 선구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친구를 위해 까르띠에는 손목에 착용할 수 있는 독창적인 디자인의 시계를 만들었고, 이 제품은 ‘산토스(Santos)’라는 이름으로 현재까지 100년이 넘도록 사랑받고 있다.

한편 파일럿을 위한 기능을 갖춘 시계는 스위스의 론진에서 처음 개발했다. 1919년 론진은 시계제조사 최초로 국제항공협회의 공식 납품업체가 되었다. 당시 론진의 비행용 시계는 조종석에 부착 가능한 형태였고, 기능성과 정밀성이 뛰어났다. 1927년에는 미국의 조종사 찰스 린드버그(Charles Lindbergh)가 뉴욕에서 파리까지 단엽기를 몰고 무착륙으로 대서양 횡단에 성공하게 되는데 이때 사용된 시계가 바로 론진의 시계였다. 이후 린드버그는 보다 편리하게 비행시각과 경도 확인이 가능한 시계를 만들고자 했으며, 그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개발된 제품이 론진의 ‘린드버그 아워앵글’이었다. 이 시계는 다이얼을 회전시켜 시차와 현재 위치의 경도 확인이 가능했다.

이런 파일럿 시계의 전통은 브라이틀링의 ‘내비타이머’, 롤렉스의 ‘GMT-마스터’, IWC의 ‘빅파일럿’ 등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하늘을 향한 인간의 꿈을 현대인들에게 전하고 있다.


모터스포츠와 크로노그래프 시계


스포츠에서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자동차로 스피드를 겨루는 모터스포츠는 1,000분의 1초 단위로 승부가 갈리기 때문에 보다 세밀하게 측정할 수 있는 시계가 필요했다. 모터스포츠가 태동하던 20세기 초, 시계제조사들은 저마다 시간 계측 기능이 탑재된 크로노그래프(chronograph) 시계를 생산해 선수들에게 제공함으로써 자신들의 기술력을 과시했다.

스위스의 태그호이어는 전통적으로 모터스포츠와 관련이 깊은 제조사다. 태그호이어의 전신인 호이어에서는 1911년 최초의 자동차 대시보드 크로노그래프인 ‘타임 오브 트립(Time of Trip)’을 시작으로 레이서들에게 필요한 시계를 생산했다. 특히 1963년 경영자 잭 호이어(Jack Heuer)는 세계에서 가장 험난한 오프로드 대회인 ‘까레라 파나메리카나 멕시코 로드레이서’에서 영감을 받아 ‘까레라’라는 제품을 선보였다. 이 시계는 오늘날까지 태그호이어를 대표하는 컬렉션으로 사랑받고 있다.

또한 F1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영감을 받아 1969년 발매된 태그호이어의 ‘모나코’는 배우 스티브 맥퀸(Steven McQueen)이 영화 <르망>에서 착용하며 유명해진 모델이다. 모나코는 세계 최초의 오토매틱 크로노 그래프 시계이자 사각형 디자인의 방수시계이며, 자동으로 태엽이 감기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용두를 왼쪽에 배치했다. 그 밖에도 롤렉스의 ‘데이토나’, 오메가의 ‘스피드마스터’, 쇼파드의 ‘밀레밀리아’ 등 모터스포츠의 DNA를 간직한 크로노그래프 시계들이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을 ‘기록’하고 있다.


일상에 이야기를 더하다.


백화점에서 명품시계를 구입한 어떤 사람이 매장 직원에게 고함을 지르며 항의했다. 천만 원이 넘는 명품시계가 시간이 잘 맞지 않는다며 환불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가 구입한 모델은 기계식 시계였다. 배터리나 전자장치 없이 오직 태엽과 톱니바퀴 같은 부품으로 시간을 표시한다. 아날로그 방식이며, 당연히 오차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아니, 오차가 있기 때문에 비싼 값을 지불해야 한다. 작은 부품으로 정확한 시간을 구현하기 위해 오랜 경력의 숙련공들이 자신의 시간을 시계에 담기 때문이다. 그 고객은 자신의 물건에 어떤 가치가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비싼 명품이라는 이유로 구입했을 것이다. 만약 정확한 시계를 원했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 잘못 찾았다.

오늘날 기계식 시계의 여러 기능들은 더 이상 특별한 것이 아니다. 전자시계나 스마트폰으로 훨씬 더 정확하게 날짜, 요일, 시간을 확인할 수 있고 시간 계측, 타이머, 알람 등의 기능을 간단하게 구현할 수 있다. 실용성만 따진다면 기계식 시계는 이미 세상에서 사라졌어야 할 물건이다. 그럼에도 기계식 시계가 아직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 안에서 다른 가치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독창성, 정확성, 심미성을 추구하는 장인들의 열정이다. 아무도 육상 선수에게 “어차피 자동차를 이길 수 없는데 왜 힘들게 달리냐”고 묻지 않는다. 그는 자동차와 겨룰 생각이 없으며, 그저 묵묵히 자신의 기록과 싸울 뿐이다. 시계 장인들도 그러하다. 이들이 만든 시계는 오랫동안 바다, 하늘, 땅에서 한계에 도전하는 사람들과 함께했다. 그리고 오늘날 평범한 일상에 모험과 도전의 이야기를 더하고 있다.

 

 

 

대량생산과 부품의 규격화를 통해 점차 일반인들도 시계를 손쉽게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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