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는 한 나는 예전에도 뚱뚱했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지닌 어떤 실체보다도 지방과 오랜 관계를 맺어오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복잡한 관계가 아니라거나, 절대로 지방과 싸운 적이 없다거나, 만약 이런 실체를 버리고 다른 어떤 것을 경험했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까를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오래되고 친숙한 관계의 본질에 대해 자신을 속이지 말자!). 나아가 내가 지방과 맺는 관계가 다른 사람들과 같거나, 다른 사람들 역시 나와 같은 경험과 이해를 해야 한다고 상기시키려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그동안 지방과 맺어온 다양한 경험과 그 결과들이 지방을 친근하게 여길 수 있게 만들어줬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주변을 조금만 둘러봐도 지방은 우리에게 구체적이고 지속적으로 인간의 다양성을 일깨워준다. 비만인을 표현한 카툰을 보면 뚱뚱한 몸을 바라보는 일정한 시선이 느껴진다. 하나같이 헬륨 가스를 집어넣은 것처럼 기괴할 정도로 퉁퉁 부은 모습이다.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뚱보’ 사진, 죄를 지었는지 머리가 잘리고 퉁퉁한 상체만 둥둥 떠다니는 사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뚱뚱한 몸의 현실은 다르다. 내가 수영장 파티와 옷 교환 모임, 스파와 온천 등 뚱뚱한 여성들이 많이 모이는 공간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큰 기쁨이고 행운이었다. 비만한 몸이 갖는 무궁무진한 다양성은 나에게 끝없이 감동을 준다. 온갖 독특함과 비율과 크기의 다양성이 그 공간에서 펼쳐진다. 그 다양성은 지방이 추가되고 몸집이 커지면서 극대화되고, 다양한 라인과 비율을 통해 몸의 개별성은 더욱 뚜렷해진다. 온갖 다른 사이즈와 점진적인 크기가 구현된 인간 체형의 모든 변화 가능성이 거기에 있다.
배와 궁둥이는 말할 것도 없고 종아리와 등, 팔, 크고 작은 가슴, 엉덩이와 허벅지가 그렇다. 다양한 비율로, 다양한 지점에서 올라갔다 내려가며 굽이치고 출렁이는 풍경이 그곳에서 펼쳐진다. 첼로 같은 몸도 있고 루벤스의 그림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몸도 있다. 빌렌도르프(Willendorf)의 비너스도 있고 달걀처럼 우아한 곡선에 필요한 모든 요소를 완비한 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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