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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자기만의 산책>

01. 엘리자베스 카터

by BOOKCAST 2022.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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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내 인생 전체와 내가 나눈 대화를 모두 담은 진실한 이야기를 바란다면우선 아침에 나의 잠을 깨워주는 독특한 장치에 대해 알아야 한다내 침대 머리맡에는 벨이 하나 있고그것에는 노끈과 납 조각이 하나 달려 있다내가 부서진 유리창 사이로 들어오는 부드러운 산들바람 소리에 깨어 있을 때그 노끈은 유리창의 갈라진 틈을 통해 밑에 있는 정원으로 내려가 섹스톤의 손아귀에 들어간다섹스톤은 새벽 4시에서 5시 사이에 일어나 마치 내 머리맡에 있는 종을 치는 것처럼 있는 힘껏 그 노끈을 잡아당긴다이렇게 아주 기이한 발명품 덕분에 나는 간신히 일어나게 되고 … 아침 6시에 대체로 내가 하는 일은 내 지팡이를 집어 들고 걷는 것이다가끔은 혼자 걷고또 가끔은 동행과 같이 걷기도 한다가는 길에 그 사람 집에 들러서 반쯤 잠들어 있는 사람을 끌어내 동행으로 삼는 편인데 … 그렇게 나와 함께 긴 여정에 동참하는 동행들은 대부분 인내심을 시험당하기 마련이다그들은 가끔 탁 트인 공유지에서 이글이글 내리쬐는 태양에 반쯤 구워진 후에옥수수밭 한가운데에 난 좁디좁은 길로 끌려가다가아침 이슬에 흠뻑 젖고마지막엔 새들 말고는 어떤 동물도 발길을 들인 적 없는 그늘지고 갑갑한 덤불 사이를 헤치고 나오기 마련이다요컨대산책이 끝날 무렵이면 우리의 몰골은 한숨이 나올 정도로 너덜너덜해져서신중한 시골 판사가 우리를 본다면 부랑자로 착각해 걸어 다니는 천재인 우리를 감옥에 집어넣지 않을까 싶다그런 우려가 떠올랐지만 그다지 두렵진 않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예의 바른 청년들 몇 명이 우리를 보고 모자를 벗었다그리고 서로 눈짓하며 감탄하는 목소리로 내가 카터 목사의 딸이란 말을 하는 걸 들었다그보다는 차라리 우리에게 다가와 좋은 아침입니다아가씨라거나 지금 내기를 하느라 걷고 계시는가요?” 같은 말을 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 엘리자베스 카터가 캐서린 탤벗에게 보낸 편지1,746
 


엘리자베스 카터는 목사의 딸로 태어나 18세기에 남녀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지식인 중 한 명이 됐다. 하지만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을 방랑자로 착각하길 바라는 마음도 품고 있었다. 그녀는 걸어 다니는 천재로 비범한 지성의 소유자인 데다 거의 한평생 살아온 딜 근처 켄트 해안을 걷는 것에서 가장 큰 기쁨을 느꼈다. 걷기에 대한 카터의 욕망은 실로 강렬해서 그녀는 땅의 수호신이 아니라 여행의 신에게 사로잡혔다고 표현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카터는 걷기가 마음을 달래줄 뿐 아니라 유용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자연에서 걸을 때면 적어도 한동안은 사회적 예의범절과 처신에 대해 남들의 눈치를 보거나 신경 쓸 필요 없이 자유로웠기 때문에 걷기를 통해 해방감을 한껏 즐겼다. 또한 자신의 짧은 인생을 생각하면서 자신이 걷는 그 땅의 오랜 역사를 떠올리며 지적 호기심의 자극을 받곤 했다.

18세기 여성들은 (실은 그 후로도) 잘 가꿔진 정원을 걷는 것 이상으로 수고롭게 걷는 행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는 통념이 오랫동안 전해져왔다. 여성들이 자유롭게 배회할 수 있기에는 개인적인 안전과 더불어 신경 써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말도 계속해서 나왔다. 하지만 18세기에는 순전히 재미로 걷는 남자들도 별로 없었다. 자주 걸어 다녔던 사람들은 이동해야 할 이유가 있어서 그랬다. 예를 들어 우리 집 근처 스코틀랜드 국경에 있는 오래된 헤링 로드는 람메르무어 힐스의 높은 황야 지대를 횡단해서 던바에서 로더까지 뻗어있는데, 북해에서 잡은 물고기로 가득한 바구니를 머리에 인 여자들이 시장으로 가기 위해 그 길을 걸어 다녔다. 레이크 지역과 스코틀랜드의 서해안에 사는 사람들이 시신을 무덤까지 운반하기 위해 관의 길을 걸어 다녔던 반면, 에든버러 남쪽에 있는 펜트랜드 힐스 주민들은 일요일마다 10마일씩 걸어서 교회에 갔고, 다시 집까지 10마일을 걸어서 왔다. 영국 전역에서 소나 양을 모는 사람들, 생선 장수들, 하인들, 땜장이들, 군인들, 집시들과 거지들은 모두 18세기와 그 이후까지 걸어 다녔던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자신의 신원을 제대로 증명할 수 없었던 부랑자들은 그렇게 돌아다니다 법의 처벌을 받았다.

엘리자베스 카터가 걷기에 대한 애정이 특별했던 이유는 단순히 그녀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이 아니라 재미로 걷는다는 생각 자체가 특이했기 때문이다. 당시 재력이 있는 사람들은 보통 말을 타거나 마차를 타고 가는 식으로 여행을 다녔다. 캐서린 탤벗(Catherine Talbot)에게 보내는 편지에 여성이기에 모욕당할 위험에 대해 언급하긴 했지만, 그녀가 밖에 나가서 걸어 다닐 때 두려워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보다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계급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할까봐 두려워했다. 그녀가 진정한 소속감을 느낀 순간은 자연에 있을 때였고, 그곳을 걸어 다닐 때 자연을 가장 가깝게 접할 수 있었다.

그녀가 동시대인들과 달랐던 점은 걷기에 대한 애정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특출나게 머리가 좋았을 뿐만 아니라 독립적인 기질도 눈에 띄었다. 1734년에 열일곱 살의 나이로 작품을 공개한 시인인 그녀는 그 후 20년 동안 시인으로서 그리고 놀랄 정도로 뛰어난 언어 구사 능력 덕분에 잉글랜드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박식한 여성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녀의 가장 훌륭한 작품은 1758년 출간됐다. 에픽테토스의 모든 작품(All the Works of Epictetus)이란 책을 그리스어에서 영어로 번역한 번역서로 에픽테토스는 고전 스토아 철학자 중에서 굉장히 영향력 있는 학자 중 하나다. 카터의 번역서는 20세기 초까지 그 분야 학술서의 척도로 남아있었다. 그리스어는 그녀가 유창하게 구사하는 아홉 개의 언어 중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1806년 거의 아흔이었던 카터는 계몽주의 시대에 아주 큰 영향력 있는 명사 중 한 명으로 큰 존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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