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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깊은 밤을 건너온 너에게>

01. 생각의 결

by BOOKCAST 2022.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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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갑고 기쁘다. 나이가 어리고 많음은 중요하지 않다. 나이가 많아도 아이 같은 사람이 있고, 나이가 어려도 생각이 깊은 사람도 있다. 생각의 결이 맞는 사람들에게서 안정감을 얻고, 그들의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생각을 키워나갈 수 있다. 성장한 생각은 삶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게 도와준다. 생각의 결이 비슷하다는 것은 자신에게 맞는 수채화 종이를 찾는 것과 같다.

수채화 종이는 표면의 질감이 거친 정도와 물을 머금는 시간에 따라 황목, 중목, 세목으로 나뉜다. 황목은 표면의 돌기가 가장 많다. 물을 머금은 붓으로 그리면 종이의 움푹 팬 부분에 물감이 고여 돌기들이 알갱이처럼 두드러진다. 물이 거의 없는 붓으로 그리면 돌기 부분에 물감이 채색되어 거친 질감을 표현할 수 있다. 이런 특성 때문에 황목은 세밀한 묘사에 적합하지 않다. 중목은 황목과 세목의 중간 단계다. 결이 약간 있기에 세밀한 묘사와 다양한 기법을 할 수 있다. 세목은 표면 질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워 주로 묘사와 고르게 채색할 때 사용된다.

같은 색이지만, 그림을 그릴 때 황목이 상대적으로 어둡게 보인다. 종이 질감으로 반사되는 빛의 영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주로 사용하는 수채화 종이는 황목이다. 중목과 세목에 비해 물과 물감의 번짐이 자연스럽고 붓자국이 거의 남지 않는다. 물과 물감 농도를 조절할 수 있다면 황목 위에서 자유롭게 그릴 수 있다. 처음부터 황목에 그리다가 세목으로 바꾸면 당황할 수 있다. 물을 머금는 시간이 황목에 비해 짧아 물과 물감이 번지는 범위가 작고 붓자국이 남기 때문이다.

수채화 종이를 살 때 표지에 면 함유량이 표시되어 있다. 면 함유량이 많을수록 물 흡수력이 높고 종이가 벗겨지는 현상이 적다. 면 함유량이 높은 종이는 잘못 그리면 수정할 수 있다는 안정감이 있다. 인간관계도 그렇다. 신뢰가 두터울수록 자신의 단점과 약점을 보여주는 것을 염려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겉은 화려한 표지이지만 속이 얇은 수채화 종이는 싫다. 종이뿐 아니라 겉과 속이 다른 사람과 만남은 고통이다. 관계를 계산하고 이득을 챙기려는 속셈이 보인다. 타인의 불행에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그의 불행을 이용한다. 이것을 지적하면 반성할 줄 모르고, 끝없이 변명하면서 자신을 정당화하려 한다. 이런 사람을 만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고 생각해야 한다. 생각하지 않고 계산하려 들면 안 된다. 계산하려 드는 순간 그런 사람이 곁에 모일 것이다.

황목은 표면의 질감이 가장 거칠어 익숙해지는 과정이 다른 종이에 비해 길다. 내게 거친 황목은 열정적인 사람과 같다. 도전과 성장으로 채색한 열정적인 사람은 내 인생의 MSG다. 주로 담백한 맛을 좋아하지만, 가끔 매운맛과 짠맛도 필요하다. 심심한 인생에 활기를 불어넣고 싶을 때는 황목처럼 거칠고 열정적인 댄스 선생님을 찾아가곤 했다. 처음에는 다루기 힘들지만 익숙해지면 원하는 번짐과 붓자국을 남길 수 있는 황목처럼 댄스와는 거리가 먼 뻣뻣한 몸이었으나 선생님의 열정 덕분에 웨이브를 할 수 있었다.

중목은 황목과 세목의 장단점이 적절하게 섞여 있다. 표면의 질감, 물을 머금는 시간, 붓자국 모두 적당한 중목은 편안한 사람과 같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인간관계를 맺는다면 그는 자신이 어떨 때 행복하고 편안한지 아는 사람이다. 자신의 감정을 알고 있기에 타인의 언행을 존중하거나 흘려보낼 수 있다.

세밀한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는 세목은 예민한 사람과 같다. 나는 머릿속이 복잡한 예민한 사람이다. 평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폭발했다. 이대로 살다가는 화병으로 마음과 몸을 해칠 것 같았다. 나 자신과 잘 지내려면 나를 표현하는 연습이 필요했다. 상담사와 대화를 나누며 자신과 타인을 지키는 대화의 적절한 선을 이해했고, 예민함이 장점이 되어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수채화 종이는 크게 황목, 중목, 세목으로 나뉘지만, 제조사에 따라 결의 차이가 있다. 종이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같은 사람이지만, 저마다 생각의 결이 다르다.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한다면 조화로운 인생이 담긴 그림을 세상에 걸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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