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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깊은 밤을 건너온 너에게>

03. 내 그림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by BOOKCAST 2022.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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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에서 혼자만 보던 그림이었다. 혼자만의 만족으로 끝나는 그림이었기에 멀찌감치 떨어져서 봐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용기를 내어 SNS에 그림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휴대전화 화면 속에서 만난 그림은 2센티미터에 불과했다. 실제 그림보다 작은 크기인 그림은 자연스럽게 멀리서 바라보는 효과를 경험하게 했다. 의도하지 않게 원근법이 적용되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발견하지 못한 어수룩함과 어색함이 보였다. 수정과 보완을 통해 완성에 가까워지려 노력했다.

원근법은 그림을 볼 때 ‘멀다’, ‘가깝다’와 같이 거리감을 느끼게 해준다. 그림과 ‘가깝다’라는 기준은 손을 뻗지 않아도 닿는 거리다. 그렇다면 ‘멀다’라는 기준은 무엇일까? ‘멀다’는 그림의 크기와 작가의 의도에 따라 달라진다. 그림의 크기가 커질수록 그림과의 거리도 멀어져야 한다. 세밀하게 묘사해야 할 때는 밀착해서 그리고, 어느 정도 완성되었을 때는 멀찍이 떨어져 전체적인 느낌을 확인하면서 그린다.

하얀 종이 위에 스케치한다. 스케치한 종이 위에 밑바탕을 칠하고 색을 쌓아가면서 전체적인 분위기를 맞춘다. 세부를 묘사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멀리서 그림을 본다. 강조해야 하는 부분은 붓의 중간을 잡고 색을 턱턱 올린다. 묘사가 더 필요한 부분은 붓 머리와 가까운 곳을 잡고 세밀하게 점 하나, 선 하나를 그린다.

가까이에서만 그린 것에는 아마추어 향기가 가득했다. 그린 당시의 분위기, 감정을 느낄 수 있지만 거기까지였다. 멀리서 그림을 바라보면서부터 달라졌다. 한 점의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그림과의 거리를 좁혔다 넓혔다 반복했다. 내가 담으려는 감정과 생각은 무엇인지 돌이켜 보며 어느 부분이 부족하고, 어떻게 보완할지, 어떤 색과 기법이 잘 어울리는지 스스로 묻고 답하며 그려나갔다. 같은 공간에서 끊임없이 관찰한다고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그림을 바라보지 못할 때는 잠깐 멈추고 밖으로 나갔다.

항상 걷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걸었다. 그 길에서 새로운 카페를 발견했다. 개업을 축하하는 화분이 카페 앞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니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손님이 없어 카페 안으로 들어가서 시그니처 메뉴를 주문했다.

진한 커피와 함께 달콤한 조각 케이크를 먹는 내게 카페 주인이 말을 건넸다. 시그니처 메뉴의 맛과 향이 어떤지 물었다. 커피의 끝맛이 약간 써서 입안에 여운이 남고, 케이크는 달지 않고 폭신해서 입맛에 잘 맞는다고 했다. 입맛에 맞아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그분의 모습은 내 사회 초년생 시절을 떠오르게 했다. 울고 웃던 지난날을 추억하자 그림 생각이 사라지면서 머릿속이 비워졌다. 시간, 공간, 행동의 작은 변화 덕분에 가벼운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그림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고, 엉켜 있던 실마리를 풀 수 있었다. 잠깐의 변화가 그림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이날 이후 잘 그려지지 않거나 마무리 작업이 되지 않을 때면 잠깐 멈추고 밖으로 나간다. 공간, 시간, 행동의 변화는 생각을 비울 수 있게 해준다. 비워진 생각 덕분에 객관적으로 그림을 바라보며 수정하고 보완할 수 있다.

 


이런 태도는 삶에도 적용된다. 문제가 생기면 모든 것을 잠시 멈추고 산책하거나 카페로 간다. 천천히 걷기, 카페 주인과 대화를 나누며 커피 마시는 것으로 고립된 생각에서 벗어난다. 가볍게 덜어낸 생각 덕분에 지금 문제를 멀리서 바라보며 천천히 해결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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