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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7

04. 메타버스 기술이 아니라 사람에 관한 연구가 더 필요한 게 아닐까? 나연엄마는 아이폰으로 아이의 사진을 많이도 찍었다. 다 정리하지 못한 사진들을 외장하드에 몇 테라나 갖고 있었다. 마침 정리해 보고 싶었다며 건넨 그 외장 하드 속 사진과 동영상을, 우리는 끝없이 들여다보았다. 덕분에 사람의 외모를 비슷하게 표현하기 위한 다양한 각도의 사진을 어렵지 않게 골랐다. 그러나 살아 있는 어떤 사람을, 그것도 누군가와 만나는 순간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그 이상이 필요했다. 버츄얼 휴먼이라고 해도 움직이고 표정을 지으면 자아를 가진 존재처럼 보인다. 게다가 우리는 엄마를 실시간으로 만나는 딸을 재현해야 한다. 단순히 외모만 재현하는 일이라면 데이터로 이루어진 마네킹을 만들면 되고, 후보정이 가능한 3D 영상을 만드는 일이라면 마음이라도 편했겠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리 단.. 2022. 11. 9.
07. 애도의 선물로 찾아온 인연 아카시꽃 향기가 흥건하던 더없이 좋은 날에 아버지를 영원히 떠나보내고 나는 골방에 처박혀 보냈다. 보냈다기보다는 견디는 시간이었다. 죽음과 애도에 관한 책을 수없이 읽었지만 막상 내 앞에 닥치고 보니 속수무책이었다. 더디게 가는 시간을 견디며 아버지 사십구재까지 지내고 나서 오랜만에 아래층에 사는 언니를 만났다. 이미 늦었지만 더 늦어지면 서운해할까 봐, 그동안 아버지 장례를 치렀노라고 했다. 순간 언니의 큰 눈이 촉촉해지더니 의자를 가까이 끌어당기며 두 손으로 내 손을 가만히 감싸 안았다. “…….” “그리 큰일을 치렀구나.” “…….” 볼 일을 마치고 밥때가 되어 점심을 먹고 났을 때 언니는 별일 없으면 함께 갈 데가 있다고 했다. 사고 싶은 식물이 하나 있는데 수형을 좀 봐달라며 바람도 쐴 겸 화원.. 2022. 3. 22.
05. 나의 친애하는 나무에게 전하는 말 도시에 살면서 나는 자작나무와 사랑에 확 빠졌다. ‘도시에 살면서’라는 말은 내가 살던 시골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는 뜻이다. 있었다 해도 그때는 관심 밖이었을 것이다. 잔가지 없이 곧게 뻗은 몸통을 감싼 하얀 수피, 잎자루가 길어 여린 바람에도 파샤샤파샤샤 팔랑이는 연초록 이파리들, 그리고 무엇보다 이파리 뒷면에 살짝 숨겨둔 은빛의 찰랑거림. 자작나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나무는 단연코 자작나무였다. 누군가를 천천히 알아갈 무렵 자작나무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그 사람이 확 좋아졌고, 우리는 자작나무에 대해 길고 긴 수다를 떨기도 했다. 강원도 인제의 자작나무숲을 다녀와서는 나중에 꼭 함께 걷자는 약속도 했다. 누군가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봤다던가,.. 2022. 3. 19.
03. 마지막 기억 새벽에 메모해 둔 종이에서 나는 소리는 좀 특별한 데가 있다. 나는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가 지금 막 깨어났다. 마침내 헌책방 아저씨와의 마지막 만남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국제전화를 끝으로 아저씨와 마지막 대화가 될 뻔했으나 나는 아저씨와의 만남을 그런 식으로 끝맺을 수는 없었다. 그해 나는 자비로 도쿄도서전에 갔다. 비행기표 예매를 하는 동시에 오치아이의 주인집 아줌마에게 빈방이 있으면 며칠 빌리고 싶다는 내용의 국제전화를 걸었다. 아줌마는 반가워하면서(내가 만든 김치를 좋아했다) 내가 살던 방은 다른 사람이 세 들어 살고 있으니 1층 아들 방을 쓰라고 했다. 마침내 아저씨를 만나러 나카이 역에 내렸다. 아저씨는 많이 야위어 있었고, 역시 말수도 적었지만, 기뻐했다. 아저씨는 나에게 들고나온 걸 전해주었.. 2022. 3. 11.
05.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미카엘 중1담임 김정현쌤' 낯익은 발신자 표시를 보고 가슴이 철렁한다. 디딘 바닥이 일순간에 저 시꺼먼 아래로 꺼져 내리는 기분. 너무나 고맙지만, 결코 반갑지 않은 그가 날 찾고 있다. 살다 보면 그런 존재, 그런 관계, 그런 상황들이 있지 않던가. 불길한 예감이 실려 집어 드는 핸드폰이 무겁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의연하고 차분했다. 한 학년 내내 줄기차게 선생님을 괴롭혔던 말썽쟁이가 또 사고를 쳤다. 나는 습관처럼 죄인 된 심정으로 머리를 조아리며 용건을 전해 듣는다. 이번 사건은 같은 반 친구랑 벌인 주먹다짐이다. 서로 조금씩 다쳤으나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사려 깊은 선생님은 학부모 안심시키기를 빠뜨리지 않는다. 둘을 데리고 막 병원으로 출발하려는 참인데 올 수 있겠느냐고 묻는.. 2022. 2. 19.
04. 보이후드 영화 는 로 익숙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작품이다. 2015년 1월 신촌의 작은 극장을 홀로 찾아 처음 이 영화를 보았다. 오전 첫 회차인 조조 상영이라 관객은 두엇뿐이었다. 바깥이나 극장 안이나, 날씨도 분위기도 을씨년스럽기가 하나같았다. 그러나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세상은 두 시간 전에 비해 훨씬 푸근했다. 마음 한편에 보드랍고 말랑한 감정들이 몽글몽글 덩이지는 걸 느꼈다. 독특하고 새로웠다. 새해 벽두였지만 조급하게도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올해 최고의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먼 훗날 인생영화를 꼽더라도 가뿐하게 베스트10 안에 들지 않을까! 한두 달 동안은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게 이 영화를 꼭 봐야 한다며 영업을 하고 다녔다. 는 평단으로부터 받아 낸 융단 호평으로도 유명하다. 한 영화평론가.. 2022. 2. 18.
03. 순수의 기원 열다섯 살, 말 안 들어 먹는 건 국가대표급이고 갈수록 제멋대로이기만 한 사춘기 소녀 로사. 그런 로사를 아직도 아빠는 가끔 “아가야!”라 부른다. 언젠가 혹자 하나는 그걸 듣고는 지청구를 놓았다. “아니, 얘가 어떻게 아직도 아가야?” 모르는 소리 하고 있다. 경솔하게 입 밖에 내서 좋을 게 없는, 그야말로 모르는 소리다. 딸이 없어 불행한 자가 요량 없이 뇌까린 말에 대꾸는 해서 무엇 하나. 대체 나이가 무슨 소용? 아빠에게 딸내미의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영원한 아가가 있다는 기쁨을 어찌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있을까! 가족 내부에서도 민원이 접수된 적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미카엘 군의 의견이었다. “로사가 지금 몇 살인데 아직도 아가라고 불러요?” 여동생이 여전히 아가인들 오빠로서 별 손해 볼 .. 2022.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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