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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리어6

05. 일이 재밌으면 왜 안 돼? 예능인 서장훈은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즐기면서 하는 거라고요? 그거 다 뻥이에요. 저는 농구를 한 번도 즐기면서 한 적이 없습니다.” 그 말을 들으며 퍼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건 형 사정이고.’ 물론 그 발언의 취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할 부분이 있다. 어떤 분야에서 그럭저럭 잘하는 정도가 아닌 명실상부 ‘최고’가 되고 싶다면 즐기기만 해선 어림없다는 뜻일 테니 말이다. 아예 범접하지 못할 재능을 타고났거나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지독한 노력이 없다면 그의 말대로 어떤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일은 분명 재미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적성에 맞아야 한다. 일은 원래부터 재미없는 것, 회사는 동아리가 아니다 라고 치부하기엔 어쩐지 뒷맛이 씁쓸하다. 그래도 이왕이면 나에게 조금이라도 .. 2022. 11. 10.
05. 회상, 직장 생활 (마지막 회) 나는 학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정치학은 조직 간이나 조직 내외의 다양한 갈등 현상을 파악하고 관리하는 학문이다. 오늘날 기업 활동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갈등을 고려할 때 정치학도 기업 경영에 연관 있는 학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졸업할 당시에는 대부분의 기업이 문과 출신자에게는 경영, 경제, 법학, 행정학을 전공 시험과목으로 인정했다. 취업에 대비하여 경제학 과목을 선택하여 필기시험에 임했던 기억이 난다. 채용의 전형적인 형태는 영어, 전공(택일), 상식의 필기시험이 1차 관문이었고, 2차 실무자 면접 및 3차 임원면접으로 이어졌다. 대한항공, 한진해운, MBC 기자직, 은행 등 여러 회사의 필기 시험에 붙었으나 최종 면접까지 통과한 곳은 J 은행과 지금은 없어진 한진해운이었다. 입사 한 뒤.. 2022. 9. 21.
01. 다시 태어나도 난 영업의 길을 걸을 것이다. 7년 전, 처음 영업인으로서 발걸음을 뗐던 그때는 연봉 1억 5천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50세가 넘어서 생소한 영업을 하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아이들 다 키워놓고 일에만 전념을 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었다. 또한 빠듯한 살림에 단돈 얼마라도 보탬이 되길 바라는 소박한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당장 한 달 생활비도 넉넉지 않은 형편에 6개월간 투자만 하고 수입은 없는 셈 치면서 일하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한 달 한 달 지날수록 부채는 늘어갔다. 지금은 원활한 자금융통이 가능하지만, 그 당시에는 내가 먼저 거래처에 지급하고 차후에 본사에서 받는 구조였다. 1년이 넘도록 부채가 누적되어 힘들었다. 그러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시작한 일이었기에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꼭 성공하고 싶었다. 나의 간절함이 통했.. 2022. 3. 16.
04. 비자 발급을 거부당하다. “줄리아, 혹시 미국의 리츠칼튼에서 근무해 보고 싶지 않아요?” 미국 본사 리츠칼튼에서 제안이 들어왔다. “당연히 근무해 보고 싶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돈도 벌고 영어도 배울 수 있는 기회 아닌가! 그러나 가고 싶다고 무조건 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엄마의 반대가 극심했다. 90년대 중반 우리나라에서 미국의 이미지는 상당히 험악했다. 보수적인 엄마의 시선에서 미국은 마약과 총기가 난무하는 무법천지의 나라였다. 엄마는 단 한 푼도 도와줄 수 없다고 선언했다. 나는 독일에서 피아노 연주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은 돈과 리츠칼튼 서울에서 받은 첫 월급을 모아 비행기 표를 샀다. 엄마는 내가 공항에 나가는 날까지 화를 내며 나와 보지도 않았다. 또 다른 장애물은 비자였다. 지금 젊은 세대에겐 믿기 힘들겠지.. 2022. 2. 24.
02. 피아노 한번 쳐 보지 그래요? 화려해 보이는 내 커리어는 내 상상 밖에서 시작되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한 호텔에서 말이다. “피아노 한번 쳐 보지 그래요?” 내게 그렇게 물은 건 피에르가르뎅 유럽 담당 영업본부장이었다. 당시 나는 대학을 막 졸업하고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사는 고모 댁에 머무르며 어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어학원에 다니면서 고모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을 도왔다. 숙식을 제공하는 고모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어서였다. 어느 날 피에르가르뎅 유럽 담당 영업본부장이 고모 가게에 찾아왔다. 신제품 소개도 하고 판매 추이도 얘기하는 정기 방문이었다. 고모는 나를 데리고 그와 함께 시내에서 가장 유서 깊은 슈타이겐베르거 프랑크푸르트 호프 호텔에 차를 마시러 갔다. 차를 마시다가 프랑스인 영업본부장이 내게 물었다. “주현 씨.. 2022. 2. 21.
01. 희망 없이 털썩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20여 년 전 미국 아멜리아섬의 리츠칼튼 호텔 VIP층 라운지에서는 아침 일곱 시가 되면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흘러나왔다. 음악을 튼 사람은 항상 나였다. 나는 거의 매일 새벽 네 시 반에 일어나 빠르게 출근 준비를 하고 45분을 뚜벅뚜벅 걸어 호텔에 여섯 시 전에 도착했다. 바로 라운지 오픈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일곱 시 시계 종이 울리면 바흐 음악을 틀면서 라운지의 문을 열었다. 그 호텔을 떠난 지 20년이 훌쩍 넘었다. 나는 지금 서울에 살고 있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이어폰에서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흘러나왔다. 한동안 일부러 피하고 듣지 않았었다. 일어나기 싫었던 새벽, 곧 마주칠 손님들, 영어를 잘 못해 늘 가슴 졸이던 나의 일상이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 2022.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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