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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8

00. <바람이 되어서라도 한 번만> 연재 예고 엄마의 몸이 한 줌의 재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 버린 지 4년, 혼자 억누르던 이야기들을 세상으로 날려 보낸다 프롤로그 새가 노래한다 편안하다. 가슴 깊이 숨겨두었던 이야기가 세상 밖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혼자 오십 년을 넘게 그것들을 꼼짝 못하게 억누르고 있었다. 스멀스멀 고개를 들기라도 하는 날이면 왈칵 쏟아지는 눈물에 풀이 꺾여 다시 숨어버린 이야기들. 이제 가볍고 아름다운 날개를 달아 밝은 세상으로 날려 보내려 한다. 언제나처럼 따라다니던 엄마의 삶 그리고 그 일부가 되어버린 내 삶. 영원히 내 곁에 있을 것 같던 엄마가 아주 먼 길을 떠나고, 이젠 가끔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려 한다. 내 어깨를 두 팔로 살포시 보듬고 조용히 속삭여준다. 수고했다고, 이제 다 지난 .. 2022. 7. 13.
05. 연골 나이가 들면서 연골이 점차 닳아 없어져서 생기는 퇴행성 관절염. 뜨끔거리는 무릎으로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리며 문득 당신을 생각했다. 손가락을 접고 펴고 손을 흔들고 걷고 뛰고 앉고 일어서고 고개를 흔들고 고개를 저을 수 있는 것까지 모두 관절이 있기 때문이지만 그 관절들은 연골이 있어야만 삐걱거리지 않는다. 연골이 있어야만 부드럽게 움직일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연골이 점차 닳아 없어지는 퇴행성 관절염, 우린 그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되지만 일상의 모든 관절이 갑자기 삐걱거리고 아프게 되어 버린 당신과의 이별. 이제는 연골이 다 닳아 뼈와 뼈가 맞부딪치는 시간, 윤활유가 다 닳아버린 엔진 같은 그 시간을 지나고 있다. 일상의 관절 사이 사이에 숨어 있던 당신이 어느 날 갑자기 떠나버린 후, 나.. 2022. 6. 17.
04. 가을이 되었네요 함께 나들이할 때면 당신보다 걸음이 빨라 항상 앞서가는 나를 두고 늘 타박했지요. 걸음걸이 하나 못 맞춘다고, 마누라하고 걸을 때면 좀 느긋하라고... 그럴 때면, 난 그래, 그래, 그래야지 하면서 살며시 손을 잡고 당신 걸음에 내 걸음을 맞춰보기도 했지만 또 걷다 보면 어느새 내 걸음은 빨라져 당신보다 앞서 있곤 했지요. 가끔 뒤를 돌아보면 앞서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저만치 느긋하게 걸어오는 당신이 거기 있었어요. 그렇게 느긋하게 내 뒷모습을 바라보며 걷던 당신, 그래서 늘 거기 있다고 생각했던 당신이 휭하니 앞서 가버린 후 늘 뒷모습만 보여주던 날들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걸음걸이 하나 못 맞추던 날들이 그렇게 후회될 수 없어요. 가을이 되었네요. 쨍한 가을 햇살 속, 저만치 앞서 걸어가는 당신.. 2022. 6. 16.
03. 쑥갓 점심으로 시킨 동태탕 위에 쑥갓 몇 잎이 얹혀 나왔네요. 쑥갓 향은 참 특이하지요. 당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그 쑥갓을, 쑥갓 향기를 오늘, 오랜만에 다시 만나네요. 우린 주말농장 텃밭 한편에 쑥갓도 길렀지요. 쑥갓만큼은 모종이 아니라 씨를 뿌리겠다고 고집하던 당신. 당신이 떠난 후, 나는 그 알량한 농사일도 그만두었어요. 따뜻한 봄 햇살 속에 씨를 뿌리던 당신 모습, 쑥쑥 자라는 채소들을 보며 ‘아이구, 고마워라’며 연신 감탄하던 당신의 목소리, 뜨거운 여름 햇살 속에서 김을 매고 있노라면 그늘에 앉아 ‘그만 하고 오라’며 흔들던 당신의 손짓, 그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그곳에서 나 혼자 덩그러니 채소를 가꾸는 일이 부질없어진 것이지요. 오늘은 당신과 마주한 일요일 저녁상이 아닌, 어느 식당에서 쑥갓 향을.. 2022. 6. 15.
02. 꾸역꾸역 김치냉장고 맨 아래 넣어두었던 마지막 김치 포기를 정리했습니다. 당신과 내가 농사지은 무와 배추로 담근 김치지요. 그러니까 벌써 두 해를 넘긴 김치네요. 당신이 담가놓은 김치가 늘 거기 있음에 안심이 되었기에 그냥 거기 두고 있었습니다. 그냥 거기 두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언제까지 거기 둘 수는 없다는 생각에 오늘은 마지막 남은 김치를 꺼내 찌개를 끓였습니다. 딸아이와 나는 저녁상을 차려 김치찌개를 가운데 두고 밥을 먹었습니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거기 둘 걸, 정리하지 말 걸, 자꾸만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곤 꾸역꾸역이라는 말이 어떤 모습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2022. 6. 14.
01. 흔적 아침이면 블라인드를 열며 창밖 대추나무에 와서 시끄럽게 구는 새들을 선한 눈으로 바라보는 당신이 거기 있습니다. 창밖을 내다보기 좋아하던 당신, 당신은 아직 그렇게 창가에 서서 아침 햇살을 즐기고 있습니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접힌 책갈피로 혹은 낯익은 글씨로, 밤늦게 집에 들어오다 보면 술 취해 돌아오는 남편을 바라보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일요일 저녁 밥상에 앉아 함께 술잔을 나누다 보면 조금 말이 많아진 붉어진 얼굴로, 화초 위에 맺힌 물방울로, 성모자상 앞에 놓인 묵주로, 잘 닦인 싱크대의 반짝임으로, 아침이면 커피 내리는 소리나 그 향기로 신문 위에 놓인 붉은 테의 돋보기로, 때론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소리로, 가을만 되면 이미 소파에 놓여있던 담요로, 당신은 늘 거기에 그렇게 있습니다. 2022. 6. 13.
00. <그녀를 그리다> 연재 예고 박상천 시집 우리 인생엔 어느 날 느닷없이 생각지도 못한 어둠 속에 버려지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시인에겐 아내와의 사별이 그랬다. 급작스럽게 아내를 떠나보내고 시인은 ‘의미 없는 시간의 한구석’에 버려졌다고 느낀다. 아내의 부재는 모든 곳에서 왔다. 겨울이 깊어져도 바뀔 줄 모르는 여름 이불로, 단추가 떨어진 와이셔츠 소매로, 김치 얼룩이 지워지지 않는 도마로, 커피 머신으로 양치 컵으로 쑥갓으로, 아내는 ‘없음’의 모습으로 시인의 곁에 내내 머문다.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기 위해 시인은 삶 곳곳에 남아 있는 아내의 흔적들에 관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아내에 대한 시를 쓰는 것이 오히려 마음을 안정시켰기 때문이다. 늘 있지만 늘 없는 아내를 생각하며 시를 쓰다가 시인은 아내의 웃음만이 아니라 도란거리는.. 2022. 6. 10.
04. 뒷모습을 보는 일 영화 을 보고 나는 꽤 오랫동안 열병을 앓듯 얼이 빠져 있었다. 영화가 너무 아름다워서 쉬이 잠들지 못하고, 도무지 알 수 없는 물음들이 장대비처럼 쏟아져 난감했다. 영화가 끝난 지 오래건만 여전히 선연한 이미지가 시도 때도 없이 눈앞에 펼쳐졌고, 어느 날은 주인공 유미코가 되어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닷가에서 미친 여자처럼 울부짖듯 울고 있는 나를 만나기도 했다. 유미코와 남편 이쿠오의 행복한 일상이 봄날처럼 흘러간다. 갓 태어난 아기의 옹알이와 함께. 오늘 아침도 이쿠오는 여느 때와 같이 아내 유미코의 다정한 배웅을 받으며 출근한다. 유미코는 집 앞에서 남편이 주택가 골목길을 빠져나갈 때까지 남편의 뒷모습을 좇는다. 남편은 한 번인가 아내를 향해 돌아보고는 아침의 밝은 빛 속으로 사라져 간다. 그리고 그.. 2022.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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