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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니가오리신작8

08. 이런 사건을 일으키지 않더라도 남은 생이 그리 길지는 않았을 터이다. 시노다 도요로서는 믿기 어렵게도 아버지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아키타 집은 팔아 버리고, 장서는 대부분 도서관에 기증하고(나머지는 유학 중인 손녀에게 물려준다고 유서에 쓰여 있고, 그 책들은 배편으로 이미 발송을 마쳤다), 가재도구 외 개인 물품도 전부 처분되고(평소 그릇에 꽂혀 있었고, 구식 카메라를 즐겨 수집하기도 하고 상당수의 음반도 갖고 있었을 터인데 그것들을 아버지가 어디서 어떻게 처분했는지 도요로서는 짐작도 가지 않는다), 통장이며 보험 증서, 연금 수첩, 집 매매 계약서와 같은 중요 서류는 물론이고 배편으로 손녀에게 보낸 짐의 부본에 이르기까지 꼼꼼하게 정리해 가방에 넣어 두었다. 확실히 충동적인 자살은 아니고, 그만한 준비를 가족에게 일절 알리지 않고 전부 혼자서 진행해 왔다는 사.. 2022. 9. 29.
06.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뼛속 깊이 스며드는 맛과 차가움. 낮에 경찰서에는 쥰이치 외에 시노다 간지의 유족과 미야시타 치사코의 유족이 와 있었다(사정 정취는 따로따로 받았지만, 첫 설명은 한방에 모여 다 같이 들었다). 유족도 아닌 쥰이치가 불려 간 까닭은 그렇게 하도록 유서와 함께 쥰이치의 연락처가 남겨져 있었기 때문이며 경찰의 설명에 따르면 츠토무에게는 일가친척이 없는 듯하다. 확실히 줄곧 독신을 유지해 왔고 외동이라서 형제자매도 없고 양친은 이미 타계했다. 하지만 단 한 명의 친척도 없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지 쥰이치는 알 수 없었다. 사촌이든 육촌이든, 그 자녀든 손주든 누군가는 있지 않을까. 아니면 츠토무 자신의 숨겨 둔 자식이라든지? 쥰이치가 아는 것만 해도 츠토무에게는 여자가 몇 명인가 있었다. 여자뿐만이 아니다. 츠토무에게는 친구도 아주 많았.. 2022. 9. 27.
02. 가 본 적이 없으니, 그리워한다는 게 이상하지만. 세 사람은 1950년대 말에 처음 만났다. 미술 관련 서적을 다루는 작은 출판사에 먼저 간지가, 몇 년 늦게 치사코와 츠토무가 입사했던 것. 출판업계 전체가 잘나가던 시절이어서 날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즐겁기도 했다. 세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동료도 있었지만 여러 해가 지나는 동안 한 사람씩 빠져나갔다)은 죽이 잘 맞아서 공부 모임이라 칭하며 연극이니 영화니 콘서트를 보러 다니기도 하고, 술잔을 기울이며 뜨겁게 예술론을 벌이기도 했다. 세 사람 사이는 츠토무가 이직해도 간지가 이직해도 변함이 없었다. 마침내 회사가 망한 후에도 공부 모임(이라는 이름의 모임)은 남았다. 각자의 인생이 있다 보니 만나는 빈도가 떨어지는 시기도 있었지만 끊긴 적은 없고, 10년 전에 느닷없이 간지가 아키타현으로 이.. 2022. 9. 22.
00. <혼자서 종이우산을 쓰고 가다> 연재 예고 갖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보고 싶은 사람도, 이곳엔 이제 하나도 없어… 수많은 작품으로 국내 480만 독자에게 사랑받은 에쿠니 가오리의 신간 장편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 『도쿄 타워』 등 수많은 작품으로 국내 480만 독자들에게 사랑받은 저자 에쿠니 가오리가 신간 장편 소설로 찾아왔다. 전작들과는 사뭇 다른 새로운 분위기의 신간으로 돌아온 에쿠니 가오리는, 유려한 문장으로 독자들에게 잔잔한 매력을 선사한다. 『혼자서 종이우산을 쓰고 가다』에서는 하나의 사건을 계기로 발생하는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치밀하게 엮어 전개한다. 에쿠니 가오리 특유의 담담하고 섬세한 문체를 통해 여러 인물들의 삶이 생동감 있게 펼쳐진다. 특히 이번 신간은 팬데믹 시대를 반영함으로써 현재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 2022. 9. 20.
05. ‘본다’는 것은 유일한 ‘Yes’다. 장거리 버스의 뱃속에 짐들이 차곡차곡 실린다. 그러나 이츠카는 자신들의 차례가 되자 짐을 맡기길 거부했다. 다른 승객들의 짐에 비해 자신들의 짐은 훨씬 작기도 했고 이것저것 중요한 물건이 들어 있어서 손닿지 않는 곳에 놔두고 싶지 않았다. 수염을 기른 중년 직원이 목을 살짝 움츠리더니, 그럼 그냥 타라고 말하는 듯이 엄지로 어깨 뒤를 가리킨다. 30번 게이트는 지하 2층으로 밤처럼 형광등이 적막하게 비추고 있다. 바깥의 맑은 하늘이 거짓인 양. “먼지 냄새 나.” 차에 오르면서 레이나가 말한다. “그보단, 디젤 엔진 냄새 같은 걸.” 이츠카가 대답했다. 냄새는 코라기보다 입으로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차 안 전체가 보이는 자리여야 안심이 될 것 같아서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는다. 저마다 배낭을 무릎 .. 2022. 1. 27.
03. 순수하고 착한 아이니까, 곧 돌아올 거예요. 어째서 옆집 부부가 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에드워드와 앨리스 벌링턴 부부는 선량한 사람들이지만, 이래서야 마치 옆집 사람이 달려와야만 할 만큼 심각한 사태가 이 집에서 일어난 것 같지 않은가. “언제 온 거야?” 그 사람들을 가리키며 아내 리오나에게 일본어로 슬며시 물었더니, “아까. 경찰차 왔을 때.”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기사카 우루우는 영 마뜩잖다. 에드워드가 어깨를 두드리며 위안의 말을 건네는 것도, 앨리스가 커피를 권하는 것도. 신고를 받고 바로 와 주었지만 30분도 안 돼 돌아간 경찰 둘이 하나같이 애들처럼 어려 보였던 것도, 현재로썬 사건성이 없다는 둥 의례적인 말만 했던 것도. 사건이 되고 나선 늦으니까 신고한 것인데―. “순찰 차량에는 연락을 해 두었으니까요.” 뚱뚱한 흑인 여성 경.. 2022. 1. 25.
02. 이츠카가 가장 자주 쓰는 영어 단어는 ‘No’다. 거리는 완전히 어두워져 버렸다. 고급 델리카트슨의 창가 카운터 석에 레이나와 나란히 앉아 이츠카는 지금 김초밥을 먹고 있다. 냉장 케이스에 진열되어 있던 그것은 선득하면서 청결한 맛이 났다. “우선 표를 사야 해.” 델리카트슨 바로 앞이 버스 발착지인 포트 오소리티 터미널이다. 가이드북에는 당일에도 표를 구매할 수 있다고 적혀 있었지만, 만석일 때도 있다기에 급한 여행은 아니라 해도 만일을 위해 우선 사 두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소심하게 느껴졌다. 무계획적인 여행을 하자고 마음먹었으면서―. “맛있다.” 새 모자를 쓰고 신이 난 레이나가 말했다. 호텔 옆 부티크에서 방금 전에 산 그 수수한 니트 모자(모스그린과 카키색이 섞인)는 하얀 피부에 인형같이 어려 보이는 얼굴의 레이나에게 잘 어울린다. “.. 2022. 1. 17.
01. 가출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국제전화가 걸려 온 시각은 오전 6시 50분. 미우라 신타로는 아직 자고 있었다. “리오나짱이야. 이츠카가 또 뭔 일을 저지른 모양이야.” 흔들어 깨우는 아내한테서 무선 전화기를 건네받았다. 신타로는 눈을 껌뻑이며 졸음을 쫓고 한쪽 손으로 머리를 긁적인다. 잠에서 깰 때면 늘 두피가 근지럽다. “여보세요.” 쉰 목소리가 나왔다. “신짱?” 여동생의 목소리는 단조로웠다. “거긴 아침이겠네. 자는데 깨워서 미안. 그런데 이츠카가 없어졌어, 레이나를 데리고.” 이해하는 데에 조금 시간이 걸렸다. “없어졌어?” 곁에 서 있던 아내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입을 삐죽 내밀어 보인다. “으응, 아마도.” 여동생의 대답이 왠지 어설프다. “거실에 편지가 놓여 있었어.” 레이나가 썼다는 그 편지를 여동생은 전화기에 대고 소.. 2022.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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