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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소설연재11

07. 대체 왜, 엄마의 엄마라는 사람은 하필이면 섣달 그믐날 자살 따위를 했을까. 100엔 숍에서 산 보풀 제거기는 성능이 꽤 우수해서 본체가 작은 것을 감안하면 의외일 만큼 큰 모터 소리와 함께 적확하게 보풀을 빨아들인다. 스웨터 두 장과 코트 한 벌의 보풀을 제거한 후, 나는 아내에게 보풀이 생긴 옷가지가 없냐고 물었다. 가능하면 코트처럼 큰 게 좋겠다고 덧붙인 까닭은 단순 작업에 몰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설명서에 따르면 털이 짧은 카펫의 보풀도 제거할 수 있는 모양인데 우리 집에 카펫 같은 건(털이 길든 짧든) 한 장도 깔려 있지 않다. “갔으면 좋았을걸.” 내 질문을 무시하고 아내는 말했다. “가지 않고서 심란하고, 그래서 보풀 따위 제거하고 있을 바엔 차라리 갔으면 좋았을걸.” 라고. 이번엔 내가 그 말을 무시한다. 남향의 거실은 밝은 데다 기름 난로 덕에 따뜻하다. 어젯밤.. 2022. 9. 28.
05. 이곳에는 일상이 있고 세상은 여느 때처럼 움직이고. 새해 첫날 밤부터 문을 여는 바(Bar)를 가와이 쥰이치는 한 곳밖에 알지 못한다. 도저히 바로 집에 들어갈 기분이 아니어서 집에선 더 멀어지지만 전철을 타고서 강변에 오도카니 자리한 그 가게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카운터석에 앉아 위스키를 주문한다. 정월 초하룻날부터 밖에서 술을 마시는 인간이 그리 흔할까 싶었는데 예상은 빗나가고 좁은 가게 안은 손님들로 복작였다. 하지만 쥰이치에게는 오히려 감사한 일이었다. 적어도 이곳에는 일상이 있고 세상은 여느 때처럼 움직이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어쩐 일로 혼자시네요.” 젊은 바텐더의 그 말에, “응. 뭐.” 라고 대답은 했지만 실은 혼자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혼자로 보이겠지만 츠토무라는 남자와 함께라고. 술잔을 아주 살짝 들어 올렸다. 헌배가 아니라 건.. 2022. 9. 26.
03. 이미 우리 가족은 와해되고 말았다. 아내가 검정 레이스 속옷(이란 요컨대 브래지어와 쇼츠)만 걸친 모습으로 커다란 코끼리를 타고 앉아 뒤에 많은 늑대를 거느린 채 거리를 행진하면서 길가의 나를 내려다보며 우아하게 미소 짓는다. 그와 같은 기묘한 꿈을 꾸고 눈을 뜨자 곁에 아내의 모습은 없고 시트와 베개만 놓여 있었다. 창밖은 이미 해가 떠올라 밝다. 아내는 거실에 있었다. 제대로 옷을 갈아입고서(나로 말할 것 같으면 파자마에 플리스를 걸쳤을 뿐이다)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잘 잤어? 새해 복 많이 받아.” 지난밤, 날짜가 바뀐 순간에 TV(새해맞이 카운트다운은 TV도쿄를 보며 맞이하는 것으로 정해 놓았다. 화려한 악기 소리가 좋다)를 보면서 건배하고 새해 인사도 입에 올렸지만 더욱 확실히 다지기 위해 다시 한번 말했다. “맥주.. 2022. 9. 23.
02. 가 본 적이 없으니, 그리워한다는 게 이상하지만. 세 사람은 1950년대 말에 처음 만났다. 미술 관련 서적을 다루는 작은 출판사에 먼저 간지가, 몇 년 늦게 치사코와 츠토무가 입사했던 것. 출판업계 전체가 잘나가던 시절이어서 날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즐겁기도 했다. 세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동료도 있었지만 여러 해가 지나는 동안 한 사람씩 빠져나갔다)은 죽이 잘 맞아서 공부 모임이라 칭하며 연극이니 영화니 콘서트를 보러 다니기도 하고, 술잔을 기울이며 뜨겁게 예술론을 벌이기도 했다. 세 사람 사이는 츠토무가 이직해도 간지가 이직해도 변함이 없었다. 마침내 회사가 망한 후에도 공부 모임(이라는 이름의 모임)은 남았다. 각자의 인생이 있다 보니 만나는 빈도가 떨어지는 시기도 있었지만 끊긴 적은 없고, 10년 전에 느닷없이 간지가 아키타현으로 이.. 2022. 9. 22.
01. 아무도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바 라운지에는 피아노가 있고 촉촉한 곡이 연주되고 있다. 부스석에 자리를 잡고 앉은 세 사람은 각자 마실 거리를 주문했다. 여위고 키가 크고 피부가 가무잡잡한 시노다 간지는 여든여섯 살, 대머리에 몸집이 작은 시게모리 츠토무가 여든 살이고, 축 늘어진 뺨이 불도그를 연상시키는 데다 숏 보브 스타일의 백발이 남의 이목을 끄는 미야시타 치사코는 여든두 살이었다.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이는 건 두 달 만으로, 그전에도 그다지 띄엄띄엄 만나지는 않았기에 예전과 같다고 세 사람 다 느끼고 있었다. 어쩐지 간단히 옛날로 돌아와 버린 것 같다고. 실제로는 아무도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시절엔 이런 날이 오리라곤 생각 못했는데.” 치사코가 그렇게 말하고 건배하듯 맥주잔을 살짝 들어 보인다.. 2022. 9. 21.
05. “이거 괴물 그림이야.” (마지막 회) 제가 귀의 고름을 닦아주고 다케이치가 저에게 여자들이 반할 거라는 바보 같은 아부를 했을 때, 저는 그저 얼굴을 붉히며 웃었을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실은 어렴풋이 짚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자들이 너한테 반하겠어’라는 속된 말을 듣고 거기에 대고 우쭐대는 느낌으로 ‘듣고 보니 짚이는 게 있어’라고 말하는 건, 만담에 나오는 부잣집 도련님의 대사로도 못 써먹을 만큼 오글거리는 감회를 드러내는 일이기에, 절대로 저는 그런 우쭐대는 마음으로 ‘짚이는 것이 있었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남자보다도 여자가 훨씬 더 난해했습니다. 저희 가족은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았고 친척 중에도 여자가 많았습니다. 또 앞에 말한 ‘범죄’를 저지른 하녀도 있군요. 저는 어릴 때부터 여자들하고만 놀며 자랐다.. 2022. 6. 28.
02. “태워버리자.” 어떤 참을 수 없는 부끄러운 생각이 덮쳐 오면, 그 기묘한, ‘아’ 하는 희미한 소리가 터져 나오곤 했다. 방금 내 가슴에 불쑥, 6년 전 이혼하던 때의 일이 선명하게 떠올라 견딜 수 없어져서, 나도 모르게 ‘아’ 소리가 새어 나온 건데, 어머니는 무슨 이유였을까? 어머니한테 나처럼 부끄러운 과거가 있을 리는 없는데. 아니, 어쩌면, 뭔가 있는 건가. “어머니도 방금 뭔가 떠오르신 거죠? 뭐예요?” “잊어버렸어.” “저랑 상관있는 일이에요?” “아니.” “그럼 나오지랑 상관있는 거예요?” “그럴…….” 어머니는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갸웃하더니, “지도 모르지.”라고 하셨다. 동생 나오지는 대학에 다니다 징집되어 남방의 섬으로 갔는데, 소식이 끊겨버린 통에 전쟁이 끝났는데도 찾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이.. 2022. 6. 17.
01. 우리 집안에도 진짜 귀족은 어머니뿐일 거야 “아.” 아침에 식당에서 수프를 한 수저 살짝 떠 드시던 어머니가 희미하게 외마디 소리를 내셨다. “머리카락?” 수프에 뭔가 불쾌한 거라도 들었나 싶었다. “아니.” 어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사뿐히 수프를 한술 입에 흘려 넣으시고는, 새초롬하게 고개를 옆으로 돌려 부엌 창문 너머 활짝 핀 산벚꽃을 바라보더니, 그렇게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다시금 사뿐히 수프 한 입을 조그만 입술 사이로 미끄러트리듯 넣으셨다. 사뿐히, 라는 표현은 어머니에게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여성 잡지 같은 데서 나오는 식사법과는 완전히 다르다. 언제가 남동생 나오지가 술을 마시면서 누나인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작위(爵位, 1869년부터 1947년까지 존재했던 일본의 귀족 제도. 공작·후작·백작·자작·남.. 2022. 6. 16.
03. 다스 게마이네_나폴리를 보고 나서 죽어라! 2. 해적 Pirate라는 단어는 저작물을 표절한 사람을 가리킬 때도 쓰이는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냐고 내가 묻자, 바바는 즉시 더 재밌겠다고 대답했다. Le Pirate, 일단 잡지 이름은 정해졌다. 말라르메나 베를렌이 관여한 , 베르하렌 일파의 , 그 외 , 모두 이국의 예술 정원에 핀 새빨간 장미꽃이다. 과거 젊은 예술가들이 세상에 알린 기관 잡지. 아아, 우리도 해보자! 여름방학이 끝나 서둘러 상경했더니 바바의 해적 열기는 더욱더 뜨거워져 있었고, 마침내 나까지도 감염되어 우리는 모였다 하면 에 대한 화려한 공상을, 아니 구체적인 계획을 주고받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1년에 네 번씩 발행. 국배판 60쪽. 전부 아트지. 클럽 회원은 해적 유니폼을 입고 가슴에는 꼭 제철에 맞는 꽃을 꽂을 .. 2022. 6. 8.
02. 다스 게마이네_바바가 편지를 보내왔다. 1. 환등(幻燈) 아아, 말하다 보니 무심코 이실직고해버렸다. 결국, 그 무렵의 나는 아까도 잠깐 말했듯이 금붕어 똥처럼 의지력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생활을 했다. 금붕어가 헤엄치면 나도 쫄래쫄래 따라가는 똥처럼 바바와의 만남을 허무하게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팔십팔야(● 八十八夜. 입춘일로부터 88일째 되는 밤.)였다. 이상하리만치 바바는 달력에 꽤 민감해서, 오늘은 경신년의 불멸일(●佛滅日. 부처도 멸할 정도로 매우 불길한 날.)이라며 풀이 죽어 있는 날이 있다가도, 오늘은 단옷날이니 어둠 축제(● 등불을 끄고 제례를 지내는 축제.)라는 둥,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렸다. 그날도 나는 우에노 공원의 단술집에서 새끼 밴 고양이, 벚나무, 꽃보라, 송충이, 그런 풍경이 자아내는 .. 2022. 6. 7.
06. 고래 보러 가자 보스턴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때는 4시 정각이었고. 그런데도 이미 땅거미가 짙다. ‘춥다’는 것이 이츠카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왜 이리 컴컴해?” 라는 것이 레이나가 한 말이었다. 자다 깬 멍한 표정이다. 터미널 안 벤치에 앉아 이츠카는 접이식 지도를 펼쳤다. 원래는 걸어서 차이나타운을 지나 그 부근에 밀집한 호텔 중 한 곳에 방을 잡을 예정이었다. 거기다 짐을 놔두고 거리를 좀 걸으며 상황을 파악한 뒤 조금 이른 저녁(이랄까, 오늘의 첫 끼니)을 먹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비가 내리고 있어서 우산 없이는 추우니 가깝더라도 지하철을 타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저기, 레이나.” 걷는 게 좋은지 지하철을 타는 게 좋은지 물어보려고 고개를 들어 보니, 옆에 있어야 할 레이나는 .. 2022.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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