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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소설책15

10. 자신만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떠나 버린 아버지에게 등을 보이는 것..(마지막 회) 남편이 운전하는 차 안에서 다케이 미도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입을 여는 순간 통곡이 터져 나올 게 뻔했고 그 이전에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유일하게 떠오르는 건 사과의 말이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일으킨 일 때문에 남편에게까지 이런 고통과 불명예를 맛보게 해서 미안하다는 마음이 뜨겁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사과해 버리면 아버지가 너무 가여운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왜냐면─. 다시 눈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쉰두 살 나이인 지금까지도 부모님을 늘 아빠 엄마라고 부르는 미도리는 생각한다. 왜냐면, 그래서는 마치 아빠가 나쁜 짓을 저지른 것 같잖아─. 아니면 나쁜 짓을 저지른 게 맞는 걸까? 마음이 너무 혼란스러워서 그 판단도 서지 않는다. 줄곧 입을 막고 있던 손수건을 한순간이라도 입에.. 2022. 10. 1.
07. 대체 왜, 엄마의 엄마라는 사람은 하필이면 섣달 그믐날 자살 따위를 했을까. 100엔 숍에서 산 보풀 제거기는 성능이 꽤 우수해서 본체가 작은 것을 감안하면 의외일 만큼 큰 모터 소리와 함께 적확하게 보풀을 빨아들인다. 스웨터 두 장과 코트 한 벌의 보풀을 제거한 후, 나는 아내에게 보풀이 생긴 옷가지가 없냐고 물었다. 가능하면 코트처럼 큰 게 좋겠다고 덧붙인 까닭은 단순 작업에 몰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설명서에 따르면 털이 짧은 카펫의 보풀도 제거할 수 있는 모양인데 우리 집에 카펫 같은 건(털이 길든 짧든) 한 장도 깔려 있지 않다. “갔으면 좋았을걸.” 내 질문을 무시하고 아내는 말했다. “가지 않고서 심란하고, 그래서 보풀 따위 제거하고 있을 바엔 차라리 갔으면 좋았을걸.” 라고. 이번엔 내가 그 말을 무시한다. 남향의 거실은 밝은 데다 기름 난로 덕에 따뜻하다. 어젯밤.. 2022. 9. 28.
01. 아무도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바 라운지에는 피아노가 있고 촉촉한 곡이 연주되고 있다. 부스석에 자리를 잡고 앉은 세 사람은 각자 마실 거리를 주문했다. 여위고 키가 크고 피부가 가무잡잡한 시노다 간지는 여든여섯 살, 대머리에 몸집이 작은 시게모리 츠토무가 여든 살이고, 축 늘어진 뺨이 불도그를 연상시키는 데다 숏 보브 스타일의 백발이 남의 이목을 끄는 미야시타 치사코는 여든두 살이었다.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이는 건 두 달 만으로, 그전에도 그다지 띄엄띄엄 만나지는 않았기에 예전과 같다고 세 사람 다 느끼고 있었다. 어쩐지 간단히 옛날로 돌아와 버린 것 같다고. 실제로는 아무도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시절엔 이런 날이 오리라곤 생각 못했는데.” 치사코가 그렇게 말하고 건배하듯 맥주잔을 살짝 들어 보인다.. 2022. 9. 21.
05. “이거 괴물 그림이야.” (마지막 회) 제가 귀의 고름을 닦아주고 다케이치가 저에게 여자들이 반할 거라는 바보 같은 아부를 했을 때, 저는 그저 얼굴을 붉히며 웃었을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실은 어렴풋이 짚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자들이 너한테 반하겠어’라는 속된 말을 듣고 거기에 대고 우쭐대는 느낌으로 ‘듣고 보니 짚이는 게 있어’라고 말하는 건, 만담에 나오는 부잣집 도련님의 대사로도 못 써먹을 만큼 오글거리는 감회를 드러내는 일이기에, 절대로 저는 그런 우쭐대는 마음으로 ‘짚이는 것이 있었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남자보다도 여자가 훨씬 더 난해했습니다. 저희 가족은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았고 친척 중에도 여자가 많았습니다. 또 앞에 말한 ‘범죄’를 저지른 하녀도 있군요. 저는 어릴 때부터 여자들하고만 놀며 자랐다.. 2022. 6. 28.
03. 저에게는 둘 중의 하나를 고르는 능력조차없던 것입니다. 첫 번째 수기 저희 아버지는 도쿄에 업무가 많은 분이어서 우에노의 사쿠라기초에 별장을 갖고 계셨습니다. 한 달에 반 정도는 도쿄의 그 별장에서 지내셨지요. 그리고 돌아올 때는 가족과 친척에게까지 그야말로 엄청나게 많은 선물을 사다 주시는 것이 뭐랄까, 아버지의 취미 같은 것이었습니다. 언젠가 도쿄에 가시기 전날 밤, 아버지는 아이들을 응접실에 모아두고 이번에 돌아올 때는 어떤 선물을 갖고 싶은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웃으며 물으시고는 그에 대한 아이들의 대답을 하나하나 수첩에 적으셨습니다. 아버지가 이렇게 아이들을 다정하게 대하는 건 드문 일이었습니다. “요조는 뭘 갖고 싶니?” 아버지가 이렇게 물으시자 저는 말문이 막혀서 우물거리고 말았습니다. 뭐가 갖고 싶냐는 질문을 들으면 저는 아무것도 갖고 싶어지.. 2022. 6. 26.
02. 저는 인간의 삶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첫 번째 수기 부끄러움이 많은 생애를 보내왔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도호쿠 지방의 시골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꽤 자란 다음에야 기차를 처음 보았습니다. 정거장에 있는 육교를 오르내리면서도 그것이 선로를 건너가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전혀 몰랐지요. 선로는 그저 정거장의 구내를 외국의 놀이시설처럼 복잡하고 즐겁게, 유행에 맞게 만들기 위해 설치된 것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것도 꽤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저는 육교를 오르내리는 행동을 상당히 세련된 놀이이자 철도 서비스 중에서도 가장 멋진 서비스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그것이 단순히 여행객들이 선로를 건너가게 만들어 놓은 굉장히 실용적인 계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흥이 깨졌습니다. 또, 어릴 .. 2022. 6. 24.
01. 서문 나는 그 남자의 사진 석 장을 본 적이 있다. 한 장은 그 남자의 유년 시절이라고 해야 하나? 열 살 전후로 추정되는 사진인데, 그 아이가 많은 여자에게 둘러싸여(아마 그 아이의 누나들, 여동생들, 그리고 사촌들인 것 같다) 정원의 연못 근처에서, 굵은 줄무늬 하카마를 입고 고개를 30도 정도 왼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이고 서서 흉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다. 흉하게? 하지만 무딘(말하자면 아름다움과 추함 따위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귀여운 꼬마네요.’ 라고 적당히 입에 발린 말을 해도 아주 빈말로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소위 말하는 세속적인 ‘귀여움’이 그 아이의 얼굴에 있기는 하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내공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얼굴을 한 번 보고 바로, ‘뭐.. 2022. 6. 23.
05. “나카이 씨! 일어나요, 불이에요!” (마지막 회) 뱀 알 사건이 있고 나서 열흘 정도 지나자 불길한 일이 또 일어나, 어머니를 더욱 깊은 슬픔에 빠뜨렸고 끝내 명을 앞당겼다. 내가, 불을 낸 것이다. 내가 불을 내다니. 내 생애 그토록 무서운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어려서부터 지금껏 꿈에서조차 한 번도 생각해본적 없었는데. 불을 소홀히 하면 불이 난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도 알지 못할 만큼, 나는 소위 ‘공주님’이었던 걸까. 밤중에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나 현관 칸막이 옆까지 갔는데, 욕실 쪽이 환했다. 무심코 들여다보니 욕실 유리문이 새빨갛고 타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잰걸음으로 달려가 욕실 쪽문을 열고 맨발로 밖에 나가 보니, 욕실 아궁이 옆에 쌓아 올린 장작더미가 맹렬한 기세로 타고 있었다. 정원과 맞닿은 아랫집 농가로 달려가 있는 힘껏 문을 두드리며.. 2022. 6. 22.
05. 다스 게마이네_“무슨 말이든 좋아. 할 마음은 있는 건가?” 3. 등용문 여기를 지나면 하나에 2전짜리 소라가 있으려나 “뭔가 터무니없는 잡지라고 하던데요.” “아뇨, 평범한 팸플릿이에요.” “바로 그런 말을 하는군요. 당신에 관한 이야기는 정말 많이 들어서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지드와 발레리를 꼼짝 못하게 할 잡지라면서요.” “당신 여기 비웃으러 왔습니까?” 내가 잠깐 아래층으로 내려간 사이에 벌써 바바와 다자이가 말다툼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다기를 들고 방으로 갔더니 바바는 방구석 책상에 턱을 괴고 아무렇게나 앉아 있고, 다자이라는 남자는 바바와 대각선으로 마주 본 다른 한쪽 구석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가늘고 긴 털이 수북한 정강이를 앞으로 뻗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졸린 듯 반쯤 감긴 눈에 매우 나른한 듯 느릿느릿한 말투였지만, 속에선 분노와 살기로 .. 2022. 6. 10.
04. 다스 게마이네_“그래도 그 녀석의 그림만은 정정당당히 인정해줘야 해.” 2. 해적 사타케는 작은 소리로 말하고 손목에 찬 금시계를 꽤 오래 바라보며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눈치였지만, “히비야에 신교향곡을 들으러 가려고. 고노에도 요새 상술이 좋아졌단 말이야. 내 옆자리엔 늘 외국인 아가씨가 앉는다니까. 요즘은 그게 낙이야.” 하고 말을 끝내자마자, 쥐처럼 가벼운 몸놀림으로 쫑쫑 달려갔다. “쳇! 기쿠야, 맥주 좀 줘. 너의 미남이 가버렸어. 사노 지로, 마시자. 내가 시시한 놈을 끌어들였네. 말미잘 같은 놈. 저런 놈이랑 싸우면 별짓 다 해도 못 이겨. 손 놓고 가만있어도 내가 날린 주먹에 그냥 척 달라붙어 버린다고.” 바바는 갑자기 진지하게 목소리를 낮추고 “그 녀석, 기쿠 손을 막 움켜잡더라니까. 저런 놈이 남의 부인을 쉽게 가로채는 거야. 내심 고자가 아닐까 싶은데.. 2022. 6. 9.
01. 다스 게마이네_당시, 내게는 하루하루가 만년(晩年)이었다. 1. 환등(幻燈) 당시, 내게는 하루하루가 만년(晩年)이었다. 사랑을 했다. 태어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전에는 내 왼쪽 옆모습만을 보이며 나의 남자다움을 내세우고자 조바심을 냈고, 상대가 단 일 분이라도 망설이면 나는 금세 어쩔 줄 몰라 하며 거센 바람처럼 달아났다. 하지만 당시 매사에 야무지지 못했던 나는, 내 몸에 달라붙어 있다고 여긴, 상처를 최소화하는 그 현명한 자기방어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이른바 절도 없는 사랑을 했다. 사랑하니까 어쩔 수 없다는 목쉰 중얼거림이 내 사상의 전부였다. 스물다섯. 나는 지금 태어났다. 살아 있다. 끝까지, 살아가리라. 진심이다. 사랑하니까 어쩔 수 없다. 그런데 나는 처음부터 환영받지 못했던 듯하다. 정사(情死)라는 낡은 개념을 몸으로 서서히 이해하기 시작했.. 2022. 6. 6.
10. 레이나는 어디든 갈 거야 (마지막 회) “다음은 어떻게 하고 싶어?” 이츠카짱이 묻는다. 보스턴 커먼 ― 호텔 앞에 있는 공원 이름이었다 ― 안을 산책하고 벤치에 앉은 참이다. 눈앞의 연못 물은 탁한 녹색이고 연못가에는 개구리 동상이 자리 잡고 있다. “이츠카짱은?” 벌써 10월인데 바지 자락을 걷어 올리고 그 얕은 못에 들어가 노는 아이가 있다. 그 곁에는 엄마로 보이는 여자도 있었는데 강아지 리드 줄 같은 것을 아들의 허리에 매고 그 한쪽 끝을 손으로 감아쥐고 있었다. 아이는 장난감 양동이와 물뿌리개를 들고 있다. 레이나는 남동생인 유즈루를 떠올렸다. 연못 안의 아이는 유즈루보다 어렸지만. “난 다 좋아, 뭘 하든 안 하든.” 이츠카짱이 말한다. “왜냐면,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여행은 하고 있는 거니까.” 그건 그렇다고 레이나도 생각한다.. 2022. 2. 1.
09. 바다로 빨려 들어가 버릴까 무서워 마크 말에 따르면, 배는 11월까지만 운항하는 듯하다. 여름철에는 거의 확실하게 어떠한 종류의 고래가 보이는데 겨울이 가까워지면서 그 확률이 떨어진단다. 만약 고래를 보지 못하게 되면, 45달러를 주고 산 승선권은 다른 날 다시 배를 탈 수 있는 티켓으로 교환해 주는 모양이었다. 승선에서 하선까지 전체 여정은 4시간이 소요되었다. 객실은 난방이 되고 있었지만, 먼 바다로 나가자 맑은 하늘이 무색하게 갑판 위는 추웠고 롱패딩이 도움이 됐다. 다만 그것을 입은 이츠카는 사촌 여동생에게도 리비 일행에게도 큰 웃음을 사게 되었다. 매점에는 아동용과 성인용 두 종류뿐이었고 아동용은 레이나에게 딱 맞는 사이즈였는데 남녀공용인 성인용은 이츠카에게는 너무 커서 흡사 어린아이가 어른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 2022. 1. 31.
06. 고래 보러 가자 보스턴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때는 4시 정각이었고. 그런데도 이미 땅거미가 짙다. ‘춥다’는 것이 이츠카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왜 이리 컴컴해?” 라는 것이 레이나가 한 말이었다. 자다 깬 멍한 표정이다. 터미널 안 벤치에 앉아 이츠카는 접이식 지도를 펼쳤다. 원래는 걸어서 차이나타운을 지나 그 부근에 밀집한 호텔 중 한 곳에 방을 잡을 예정이었다. 거기다 짐을 놔두고 거리를 좀 걸으며 상황을 파악한 뒤 조금 이른 저녁(이랄까, 오늘의 첫 끼니)을 먹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비가 내리고 있어서 우산 없이는 추우니 가깝더라도 지하철을 타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저기, 레이나.” 걷는 게 좋은지 지하철을 타는 게 좋은지 물어보려고 고개를 들어 보니, 옆에 있어야 할 레이나는 .. 2022. 1. 28.
02. 이츠카가 가장 자주 쓰는 영어 단어는 ‘No’다. 거리는 완전히 어두워져 버렸다. 고급 델리카트슨의 창가 카운터 석에 레이나와 나란히 앉아 이츠카는 지금 김초밥을 먹고 있다. 냉장 케이스에 진열되어 있던 그것은 선득하면서 청결한 맛이 났다. “우선 표를 사야 해.” 델리카트슨 바로 앞이 버스 발착지인 포트 오소리티 터미널이다. 가이드북에는 당일에도 표를 구매할 수 있다고 적혀 있었지만, 만석일 때도 있다기에 급한 여행은 아니라 해도 만일을 위해 우선 사 두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소심하게 느껴졌다. 무계획적인 여행을 하자고 마음먹었으면서―. “맛있다.” 새 모자를 쓰고 신이 난 레이나가 말했다. 호텔 옆 부티크에서 방금 전에 산 그 수수한 니트 모자(모스그린과 카키색이 섞인)는 하얀 피부에 인형같이 어려 보이는 얼굴의 레이나에게 잘 어울린다. “.. 2022.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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