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죽음12

07. 이제는 만날 수 없는 할매에게 할매는 굳센 바위 같은 사람이었다. 모진 세월의 비바람을 맞고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제자리에 서 있는 바위. 열아홉 살 전쟁미망인은 자신 앞에 놓인 운명을 받아들이고 어린 아들과 살아남기 위해 가장 단단한 바위가 되었다. 세상사 웬만한 일에 눈도 깜짝 안 하셨고 싸늘한 눈가에는 눈물이 말라 흐르지 않았다. 어느 날 그 바위틈에서 여린 풀이 자라났다. 차갑게 메말랐던 바위는 그 풀잎을 금지옥엽처럼 여기고 사랑했다. 나는 할매의 첫 손녀였고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성장했다. 우리는 25년을 한집에서 살았다. 25년째 되던 해 어느 여름날이었다. 영맘 할매! 할매! 엄마, 할매는? 엄마 할매 2층에 계신다. 요즘 자꾸 2층 소파에 누워만 계시네. 할매가 어느 날부터 2층 소파에 누워만 계셨다. 아픈 데는 없는데.. 2022. 11. 17.
06. 생로병사의 선생님께 배우는 삶과 죽음 영맘 어르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할머니 선생님도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영맘 감사합니다. 할머니 나는 이제 받을 복은 죽을 복밖에 없소. 자식 고생 그만 시키고 내일이라도 자던 잠에 죽는 것이 소원이에요. 나의 의례적인 새해 인사에 할머니는 비장함을 가득 담아 답인사하신다. 생의 마지막 경계에 가까이 서있는 요양병원에서 ‘죽음’이라는 화두는 젊은 한의사에게 언제나 조심스럽다. 사람은 모두 언젠가 죽는다. 그러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사는 이는 드물다. 잠자리에 누워 내일이 오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잠드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요양병원이라는 직장에 다니지 않았다면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타인의 늙음, 병듦, 죽음을 지켜보면서야 ‘나의 죽음, 그 순간은 어떨까.. 2022. 11. 16.
01. 치열한 노년의 삶 아무리 가까이에서 늙음과 병듦, 죽음을 관찰해도 아직은 노년의 삶이 제삼자의 일처럼 느껴진다. 다만, 영원히 늙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젊은 날을 조금 더 의미 있게 살아야 한다는 것과 늙고 병들고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에는 반드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요양병원에서 늙음을 관찰하며 한 가지 결론을 얻었다. 늙는다는 건 젊은 날을 살아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죽지 않고 살아남았기에 젊은 시절을 보내고 오늘날까지 늙을 수 있는 것이다. 다리가 불편해서 늘 휠체어에 앉아 계신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강제 징용되어 일본으로 끌려가셨다가 함께 간 사람 중 유일하게 살아남으신 그 옛날을 회상하신다. 또, 다섯 남매를 낳아 기르고 농사짓고 살림하느라 허리가 굽어 침상에 제대로 눕지 못하시는 할.. 2022. 11. 11.
00. <저는 부모님을 요양병원에 모시려고 합니다> 연재 예고 요양병원 한의사가 10년간 환자의 생로병사를 지켜본 삶의 기록! 지인들이 저에게 호기심 반, 두려움 반의 눈빛으로 하는 질문입니다. 그 지인이 2050세대라면 호기심의 마음이 조금 더 크게 느껴지고, 6080세대라면 두려움의 마음이 조금 더 크게 느껴집니다. 간혹 요양병원의 열악한 환경을 고발하는 뉴스를 보고는 “나는 늙고 병들어도 절대 요양병원에 가지 않겠다.”라며 애써 피하는 분도 계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호기심과 두려움, 회피하려는 마음은 아직 요양병원이라는 미지의 공간에 가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양병원은 누군가에게 호기심의 대상이거나, 상상하기도 싫은 두려운 미래의 공간이지만, 그곳의 환자분들에게는 오늘을 살아가는 치열한 삶의 현장입니다. 그리고 저는 매일 그분들과 함께 현장을 누비는 요양병원.. 2022. 11. 9.
03. 시즌1_나연이네 가족, 낯선 VR와의 첫만남 사실 이 일을 하면 누군가를 잃은 사람을 너무 많이 만난다. 그래서 이런저런 사연에 둔감해지고,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아이템이 될까 안 될까를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에 놀라게 된다. 그런데 그날은 그냥 들었다. 너무 맑은 날에, 나연엄마가 눈물을 흘리면서 인생이 실패로 느껴진다고 했다. 아이를 잃으면 엄마는 그냥 슬프기만 한 게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자기 자신을 손가락질하는 인간이 된다. 이상하게 화가 났다. 나라면 어떨까. 아이를 지키지 못했을 때, 나라면 누구를 손가락질할까. 나와 비슷한 연배인 나연엄마는 90년대 개그감을 갖고 있어서 대화하며 자주 웃었다. 그런데 왜 나연엄마는 아이를 잃고 3년 동안, 그렇게 아픈 기억을 기록하고 있었을까. 나연엄마는 농담처럼, 이제 갱년기가 오는.. 2022. 11. 8.
00. <너를 만났다> 연재 예고 MBC 창사 60주년 VR 휴먼 다큐멘터리 대기획 ***** 2020년 ABU 다큐멘터리 부문 대상! ***** 2021년 프리 이탈리아 스페셜 멘션상! ***** 유튜브 3천만 뷰 VR 휴먼 다큐멘터리 화제의 방송!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기술의 힘을 빌려 하늘나라에 있는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기술의 힘을 빌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어떤 수식어도 없는 이 문장이 〈너를 만났다〉의 카피였다. 처음 시도하는 프로그램이었고, 2020년 2월 인간적인 시선과 과학기술의 완벽한 조합으로 이뤄낸 MBC 〈너를 만났다〉시리즈 1,2,3을 한 권에 담아 책으로 만나게 되었다. 딸을 잃은 나연엄마의 이야기로 엄마의 사랑 이야기를, 아내를 잃은 정수 씨의 이야기로 남녀의 .. 2022. 11. 5.
05. 우리는 언제 죽을까? 우리는 언제 죽을까? 심장이 멈출 때? 혹은 뇌사에 빠질 때? 아니면 사회에서 내 존재가 잊힐 때? 어떤 순간을 죽음으로 보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삶을 무엇으로 보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나는 단순히 육체 기능의 멈춤을 죽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몸은 없어지더라도 우리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계속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어쩌면 그렇게 믿어야만 내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견딜 수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삶은 덧없지만 죽음 후는 다를 거라는 말에 기대어 본다. 디즈니, 픽사의 애니메이션 〈코코〉는 ‘죽은 자의 날’을 배경으로 이루어진다. 죽은 자의 날이라고 하면 우리나라의 제사가 생각나지만, 경건한 우리나라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멕시코의 그것은 명절이자 축제다. 화려한 색으로 장식한 해골과 촛불로 무덤을.. 2022. 9. 2.
00. <같은 파도는 다시 오지 않아> 연재 예고 오늘 치는 파도는 내가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딱 한 번의 파도니까 오늘 치는 파도는 내가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딱 한 번의 파도니까 인생의 대부분은 일을 하는 시간으로 채워진다. 우리의 시간에서 일을 떼어 내기란 어렵다. 삶에서 일을 분리할 수 없다면 중요한 건 그 시간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보내느냐이다. 일을 할 때 즐거움을 느낀다면 우리의 시간은 즐거움으로 가득 차지만, 일을 부정적인 마음으로 대한다면 많은 시간이 부정적인 감정으로 채워진다. 『같은 파도는 다시 오지 않아』의 저자 김은정은 일을 할 때 행복을 느낀다고 말한다. 『같은 파도는 다시 오지 않아』의 저자는 아버지가 출장을 갔다가 사 온 캐릭터 상품들로 가족 역할 놀이를 하던 소녀였다. 저자는 어릴 적 친구였던 캐릭터들과 함께 나이를 먹으.. 2022. 8. 19.
05. 비늘구름 뜨는 오후 (마지막 회) 엄마, 잘 지내고 있죠?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할머니랑 이모 만나 방방곡곡 여행 다니시느라 정신이 없겠어요. 언니들 만나서 엄마 계시는 곳에 갔더니 안 계시는지 “아이고, 우리 딸내미들 왔나?” 한마디 말이 없더군요. 그래도 우린 섭섭하지 않아요. 엄마가 놀러 갔다고 여기니까요. 엄마, 탁 트인 하늘 보니 속이 시원하지요? 생전에 아들 없어 말도 못 하시고, 울산 이모 묘를 그렇게 부러워하시는 모습에 참, 마음이 무거웠어요. 말로는 한 줌의 재로 만들어 흔적도 없이 새 모이가 되게 뿌려 달라고 하더니, 말씀하셨으면 될 걸 혼자 속앓이를 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팠어요. 엄마가 아주 좋지 않을 때 엄마 갈 곳도 정해 뒀다는 말에 내 집도 마련해 뒀냐며 그리 반갑게 웃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마음에 드셨.. 2022. 7. 19.
00. <바람이 되어서라도 한 번만> 연재 예고 엄마의 몸이 한 줌의 재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 버린 지 4년, 혼자 억누르던 이야기들을 세상으로 날려 보낸다 프롤로그 새가 노래한다 편안하다. 가슴 깊이 숨겨두었던 이야기가 세상 밖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혼자 오십 년을 넘게 그것들을 꼼짝 못하게 억누르고 있었다. 스멀스멀 고개를 들기라도 하는 날이면 왈칵 쏟아지는 눈물에 풀이 꺾여 다시 숨어버린 이야기들. 이제 가볍고 아름다운 날개를 달아 밝은 세상으로 날려 보내려 한다. 언제나처럼 따라다니던 엄마의 삶 그리고 그 일부가 되어버린 내 삶. 영원히 내 곁에 있을 것 같던 엄마가 아주 먼 길을 떠나고, 이젠 가끔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려 한다. 내 어깨를 두 팔로 살포시 보듬고 조용히 속삭여준다. 수고했다고, 이제 다 지난 .. 2022. 7. 13.
05. 창조 : 오늘의 나는 미래의 나를 돕는다. 밤이 있으면 낮이 있게 마련이다. 일 년 중 밤의 길이는 낮의 길이와 같다. 어느 정도 어둠이 있어야 행복한 삶도 존재한다. 행복에 상응하는 슬픔이 부재하다면, 행복은 그 의미를 상실해버리고 만다. - 칼 융 2001년 9월, 아들이 갓 돌이 지났을 때 아들의 증조모, 곧 나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근래 외할머니를 뵌 것은 2년 전 결혼식에 대구에서부터 노구를 이끌고 어렵게 올라오셨을 때와 100일이 지난 증손을 KTX 타고 내려가 안아보시게 해드린 때였다. 이제 할머니의 부고로 고향을 가며 말도 못 하는 아이에게 혼자 넋두리 삼아 죽음을 설명할 말을 찾고 있었다. “○○아, 죽는다는 건 말이야 다시는 만날 수도 다시는 안을 수도 다시는 이야기할 수도 다시는 함께 웃을 수도 다시는 눈을 마주 볼 수도 .. 2022. 7. 5.
07. 애도의 선물로 찾아온 인연 아카시꽃 향기가 흥건하던 더없이 좋은 날에 아버지를 영원히 떠나보내고 나는 골방에 처박혀 보냈다. 보냈다기보다는 견디는 시간이었다. 죽음과 애도에 관한 책을 수없이 읽었지만 막상 내 앞에 닥치고 보니 속수무책이었다. 더디게 가는 시간을 견디며 아버지 사십구재까지 지내고 나서 오랜만에 아래층에 사는 언니를 만났다. 이미 늦었지만 더 늦어지면 서운해할까 봐, 그동안 아버지 장례를 치렀노라고 했다. 순간 언니의 큰 눈이 촉촉해지더니 의자를 가까이 끌어당기며 두 손으로 내 손을 가만히 감싸 안았다. “…….” “그리 큰일을 치렀구나.” “…….” 볼 일을 마치고 밥때가 되어 점심을 먹고 났을 때 언니는 별일 없으면 함께 갈 데가 있다고 했다. 사고 싶은 식물이 하나 있는데 수형을 좀 봐달라며 바람도 쐴 겸 화원.. 2022. 3. 22.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