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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별13

07. 이제는 만날 수 없는 할매에게 할매는 굳센 바위 같은 사람이었다. 모진 세월의 비바람을 맞고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제자리에 서 있는 바위. 열아홉 살 전쟁미망인은 자신 앞에 놓인 운명을 받아들이고 어린 아들과 살아남기 위해 가장 단단한 바위가 되었다. 세상사 웬만한 일에 눈도 깜짝 안 하셨고 싸늘한 눈가에는 눈물이 말라 흐르지 않았다. 어느 날 그 바위틈에서 여린 풀이 자라났다. 차갑게 메말랐던 바위는 그 풀잎을 금지옥엽처럼 여기고 사랑했다. 나는 할매의 첫 손녀였고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성장했다. 우리는 25년을 한집에서 살았다. 25년째 되던 해 어느 여름날이었다. 영맘 할매! 할매! 엄마, 할매는? 엄마 할매 2층에 계신다. 요즘 자꾸 2층 소파에 누워만 계시네. 할매가 어느 날부터 2층 소파에 누워만 계셨다. 아픈 데는 없는데.. 2022. 11. 17.
03. 시즌1_나연이네 가족, 낯선 VR와의 첫만남 사실 이 일을 하면 누군가를 잃은 사람을 너무 많이 만난다. 그래서 이런저런 사연에 둔감해지고,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아이템이 될까 안 될까를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에 놀라게 된다. 그런데 그날은 그냥 들었다. 너무 맑은 날에, 나연엄마가 눈물을 흘리면서 인생이 실패로 느껴진다고 했다. 아이를 잃으면 엄마는 그냥 슬프기만 한 게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자기 자신을 손가락질하는 인간이 된다. 이상하게 화가 났다. 나라면 어떨까. 아이를 지키지 못했을 때, 나라면 누구를 손가락질할까. 나와 비슷한 연배인 나연엄마는 90년대 개그감을 갖고 있어서 대화하며 자주 웃었다. 그런데 왜 나연엄마는 아이를 잃고 3년 동안, 그렇게 아픈 기억을 기록하고 있었을까. 나연엄마는 농담처럼, 이제 갱년기가 오는.. 2022. 11. 8.
00. <너를 만났다> 연재 예고 MBC 창사 60주년 VR 휴먼 다큐멘터리 대기획 ***** 2020년 ABU 다큐멘터리 부문 대상! ***** 2021년 프리 이탈리아 스페셜 멘션상! ***** 유튜브 3천만 뷰 VR 휴먼 다큐멘터리 화제의 방송!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기술의 힘을 빌려 하늘나라에 있는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기술의 힘을 빌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어떤 수식어도 없는 이 문장이 〈너를 만났다〉의 카피였다. 처음 시도하는 프로그램이었고, 2020년 2월 인간적인 시선과 과학기술의 완벽한 조합으로 이뤄낸 MBC 〈너를 만났다〉시리즈 1,2,3을 한 권에 담아 책으로 만나게 되었다. 딸을 잃은 나연엄마의 이야기로 엄마의 사랑 이야기를, 아내를 잃은 정수 씨의 이야기로 남녀의 .. 2022. 11. 5.
05. 비늘구름 뜨는 오후 (마지막 회) 엄마, 잘 지내고 있죠?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할머니랑 이모 만나 방방곡곡 여행 다니시느라 정신이 없겠어요. 언니들 만나서 엄마 계시는 곳에 갔더니 안 계시는지 “아이고, 우리 딸내미들 왔나?” 한마디 말이 없더군요. 그래도 우린 섭섭하지 않아요. 엄마가 놀러 갔다고 여기니까요. 엄마, 탁 트인 하늘 보니 속이 시원하지요? 생전에 아들 없어 말도 못 하시고, 울산 이모 묘를 그렇게 부러워하시는 모습에 참, 마음이 무거웠어요. 말로는 한 줌의 재로 만들어 흔적도 없이 새 모이가 되게 뿌려 달라고 하더니, 말씀하셨으면 될 걸 혼자 속앓이를 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팠어요. 엄마가 아주 좋지 않을 때 엄마 갈 곳도 정해 뒀다는 말에 내 집도 마련해 뒀냐며 그리 반갑게 웃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마음에 드셨.. 2022. 7. 19.
08. 근원 : 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자리 성공은 행복의 열쇠가 아닙니다. 행복이 성공의 열쇠입니다.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한다면, 당신은 성공한 것입니다. - 알베르트 슈바이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2022년 임인년 범띠이신 당신의 해를 맞지 못하고 작년 연말 동지에 돌아가셨다. 슬픈 것은, 2년 동안 요양원에 계시다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집에서 뵌 모습이 오래되어 실감이 나지 않더라는 거다. 이제 더 이상 집에 안 계신 것이 잠시 부재중이신 건지 아주 안 계신 건지. 내가 조금만 더 현명했으면 임종을 지켰으리라. 열이 높고 혈압은 낮고 호흡이 가쁘다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호흡이다. 목‘숨’이다. 그때 어떡하든 자리를 지켰어야 했다. 천추의 한이 되는 마음을 겨우 가라앉힌다. 다달이 붓고 있던 상조회사의 도움을 빌어 급하게 빈소를 차렸.. 2022. 7. 8.
06. 홀아비 (마지막 회) 회사엘 다니던 당신은 일요일에도 출근을 해야 했지. 딸이 아주 어렸던 시절. 나는 일요일이면 딸을 데리고 어딘가로 향했지. 아동극을 보러 간다거나 한강 고수부지로 나들이를 간다거나 그냥 백화점 구경을 가기도 했지. 좀 더 큰 후에는 서점엘 데리고 나갔다가 퇴근하는 당신을 만나 함께 저녁을 먹기도 하고. 일요일마다 혼자 딸을 데리고 나가는 나를 보며 아파트 주민들은 홀아비인 줄 착각을 했고, 너무 젊어서 홀아비가 된 나를 불쌍히 생각한다는 얘길 전해 듣고 우린 한참을 웃었지. 20년도 넘은 세월이 지난 후, 어느 날 당신은 떠나고 난 진짜 홀아비가 되었어. 매주 어린 딸과 함께 나가던 그땐 내가 그의 손을 잡았지만, 이젠 가끔 딸이 내 팔짱을 끼기도 하지. 양 갈래로 곱게 머리를 땋은 딸이 아니고 이젠 서.. 2022. 6. 18.
05. 연골 나이가 들면서 연골이 점차 닳아 없어져서 생기는 퇴행성 관절염. 뜨끔거리는 무릎으로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리며 문득 당신을 생각했다. 손가락을 접고 펴고 손을 흔들고 걷고 뛰고 앉고 일어서고 고개를 흔들고 고개를 저을 수 있는 것까지 모두 관절이 있기 때문이지만 그 관절들은 연골이 있어야만 삐걱거리지 않는다. 연골이 있어야만 부드럽게 움직일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연골이 점차 닳아 없어지는 퇴행성 관절염, 우린 그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되지만 일상의 모든 관절이 갑자기 삐걱거리고 아프게 되어 버린 당신과의 이별. 이제는 연골이 다 닳아 뼈와 뼈가 맞부딪치는 시간, 윤활유가 다 닳아버린 엔진 같은 그 시간을 지나고 있다. 일상의 관절 사이 사이에 숨어 있던 당신이 어느 날 갑자기 떠나버린 후, 나.. 2022. 6. 17.
04. 가을이 되었네요 함께 나들이할 때면 당신보다 걸음이 빨라 항상 앞서가는 나를 두고 늘 타박했지요. 걸음걸이 하나 못 맞춘다고, 마누라하고 걸을 때면 좀 느긋하라고... 그럴 때면, 난 그래, 그래, 그래야지 하면서 살며시 손을 잡고 당신 걸음에 내 걸음을 맞춰보기도 했지만 또 걷다 보면 어느새 내 걸음은 빨라져 당신보다 앞서 있곤 했지요. 가끔 뒤를 돌아보면 앞서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저만치 느긋하게 걸어오는 당신이 거기 있었어요. 그렇게 느긋하게 내 뒷모습을 바라보며 걷던 당신, 그래서 늘 거기 있다고 생각했던 당신이 휭하니 앞서 가버린 후 늘 뒷모습만 보여주던 날들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걸음걸이 하나 못 맞추던 날들이 그렇게 후회될 수 없어요. 가을이 되었네요. 쨍한 가을 햇살 속, 저만치 앞서 걸어가는 당신.. 2022. 6. 16.
03. 쑥갓 점심으로 시킨 동태탕 위에 쑥갓 몇 잎이 얹혀 나왔네요. 쑥갓 향은 참 특이하지요. 당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그 쑥갓을, 쑥갓 향기를 오늘, 오랜만에 다시 만나네요. 우린 주말농장 텃밭 한편에 쑥갓도 길렀지요. 쑥갓만큼은 모종이 아니라 씨를 뿌리겠다고 고집하던 당신. 당신이 떠난 후, 나는 그 알량한 농사일도 그만두었어요. 따뜻한 봄 햇살 속에 씨를 뿌리던 당신 모습, 쑥쑥 자라는 채소들을 보며 ‘아이구, 고마워라’며 연신 감탄하던 당신의 목소리, 뜨거운 여름 햇살 속에서 김을 매고 있노라면 그늘에 앉아 ‘그만 하고 오라’며 흔들던 당신의 손짓, 그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그곳에서 나 혼자 덩그러니 채소를 가꾸는 일이 부질없어진 것이지요. 오늘은 당신과 마주한 일요일 저녁상이 아닌, 어느 식당에서 쑥갓 향을.. 2022. 6. 15.
02. 꾸역꾸역 김치냉장고 맨 아래 넣어두었던 마지막 김치 포기를 정리했습니다. 당신과 내가 농사지은 무와 배추로 담근 김치지요. 그러니까 벌써 두 해를 넘긴 김치네요. 당신이 담가놓은 김치가 늘 거기 있음에 안심이 되었기에 그냥 거기 두고 있었습니다. 그냥 거기 두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언제까지 거기 둘 수는 없다는 생각에 오늘은 마지막 남은 김치를 꺼내 찌개를 끓였습니다. 딸아이와 나는 저녁상을 차려 김치찌개를 가운데 두고 밥을 먹었습니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거기 둘 걸, 정리하지 말 걸, 자꾸만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곤 꾸역꾸역이라는 말이 어떤 모습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2022. 6. 14.
01. 흔적 아침이면 블라인드를 열며 창밖 대추나무에 와서 시끄럽게 구는 새들을 선한 눈으로 바라보는 당신이 거기 있습니다. 창밖을 내다보기 좋아하던 당신, 당신은 아직 그렇게 창가에 서서 아침 햇살을 즐기고 있습니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접힌 책갈피로 혹은 낯익은 글씨로, 밤늦게 집에 들어오다 보면 술 취해 돌아오는 남편을 바라보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일요일 저녁 밥상에 앉아 함께 술잔을 나누다 보면 조금 말이 많아진 붉어진 얼굴로, 화초 위에 맺힌 물방울로, 성모자상 앞에 놓인 묵주로, 잘 닦인 싱크대의 반짝임으로, 아침이면 커피 내리는 소리나 그 향기로 신문 위에 놓인 붉은 테의 돋보기로, 때론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소리로, 가을만 되면 이미 소파에 놓여있던 담요로, 당신은 늘 거기에 그렇게 있습니다. 2022. 6. 13.
00. <그녀를 그리다> 연재 예고 박상천 시집 우리 인생엔 어느 날 느닷없이 생각지도 못한 어둠 속에 버려지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시인에겐 아내와의 사별이 그랬다. 급작스럽게 아내를 떠나보내고 시인은 ‘의미 없는 시간의 한구석’에 버려졌다고 느낀다. 아내의 부재는 모든 곳에서 왔다. 겨울이 깊어져도 바뀔 줄 모르는 여름 이불로, 단추가 떨어진 와이셔츠 소매로, 김치 얼룩이 지워지지 않는 도마로, 커피 머신으로 양치 컵으로 쑥갓으로, 아내는 ‘없음’의 모습으로 시인의 곁에 내내 머문다.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기 위해 시인은 삶 곳곳에 남아 있는 아내의 흔적들에 관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아내에 대한 시를 쓰는 것이 오히려 마음을 안정시켰기 때문이다. 늘 있지만 늘 없는 아내를 생각하며 시를 쓰다가 시인은 아내의 웃음만이 아니라 도란거리는.. 2022. 6. 10.
04. 뒷모습을 보는 일 영화 을 보고 나는 꽤 오랫동안 열병을 앓듯 얼이 빠져 있었다. 영화가 너무 아름다워서 쉬이 잠들지 못하고, 도무지 알 수 없는 물음들이 장대비처럼 쏟아져 난감했다. 영화가 끝난 지 오래건만 여전히 선연한 이미지가 시도 때도 없이 눈앞에 펼쳐졌고, 어느 날은 주인공 유미코가 되어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닷가에서 미친 여자처럼 울부짖듯 울고 있는 나를 만나기도 했다. 유미코와 남편 이쿠오의 행복한 일상이 봄날처럼 흘러간다. 갓 태어난 아기의 옹알이와 함께. 오늘 아침도 이쿠오는 여느 때와 같이 아내 유미코의 다정한 배웅을 받으며 출근한다. 유미코는 집 앞에서 남편이 주택가 골목길을 빠져나갈 때까지 남편의 뒷모습을 좇는다. 남편은 한 번인가 아내를 향해 돌아보고는 아침의 밝은 빛 속으로 사라져 간다. 그리고 그.. 2022.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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