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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추천22

04. 스파이더맨의 비애 아침에 일어나니 작은 아이가 큰아이 방에서 함께 자고 있었다. 밥을 먹으면서 물었다. 엄마 : 진아, 자다가 무서운 꿈 꿨니? 그래서 형 방에서 잤어? 진 : 엄마, 어제 진짜 무서웠어. 내가 스파이더맨이 된 거야. 엄마 : 스파이더맨? 진 : 어. 근데 엄청 높은 빌딩에서 형한테 뛰어내리라고 했거든. 내가 잡아 준다고. 엄마 : 그래서? 진 : 형을 놓쳤는데, 죽은 거야. 얼마나 무섭고 놀랐는지 몰라. 자다가 깨서 형 방에 갔잖아. 엄마 : (웃으며) 그래. 괜찮아. 개꿈이네. 두 아이가 학교에 갔다 오더니 학원 갈 준비를 한다. 큰아이가 큰소리로 나를 불렀다. 엄마 : 어. 왜? 형 : 엄마, 진이가 나한테 새 자전거를 준대. 엄마 : 진짜? 형 : 엉. 영원히 가지래. 어제 살려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2022. 5. 30.
09. 지금은 진분홍 시간이에요. (마지막 회) 누군가는 ‘뫼르소의 시간’이니 ‘니체의 시간’이니 하지만, 나는 언제부턴가 꽃 뒤에 시간을 붙이는 습관이 생겼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봄까치꽃의 시간, 찔레꽃의 시간, 인동초의 시간, 모란꽃의 시간, 으아리꽃의 시간, 수수꽃다리의 시간, 도라지꽃의 시간, 지칭개의 시간, 분꽃의 시간, 산국의 시간. 한창 아름답게 피어있는 절정 속의 꽃에 시간을 붙여 잠깐이나마 그 꽃으로 인해 쉼의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그렇다고 한창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모든 꽃에 시간을 붙이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아무 꽃에나 붙이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마음이 직관적으로 하는 일인데, 찬찬히 살펴보면 기준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대충의 기준이 이러하다. 흔한 듯 하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을 기울여야 눈에 들어오는, 그래서 .. 2022. 3. 24.
08. 나의 비밀 나무 도서관 가는 길에 ‘나의 비밀 나무’라 부르는 보물 나무가 한 그루 있다. 가든형 숯불갈비집 너른 정원에 있는 나무인데, 주인의 허락도 없이 내 나무라 정했으니 비밀인 것이다. 내 가슴께 높이의 담장 옆에 있어 정원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나무와 가까이서 눈맞춤할 수 있어 다행이다. 도서관 문턱이 닳도록 10년 넘게 다녔으니 나무 옆을 10년은 족히 스쳤을 텐데 나무를 알아본 건 최근의 일이다. 귀한 나무는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는 아니므로 귀한 나무라 해야겠다. 이 나무를 처음 만난 건 책벗들과 함께 북촌 한옥마을 골목길을 걷다가 우연히 들어선 중앙고등학교 교정에서였다. 나뭇잎도 다 떨군 11월 즈음이었을까. 특이한 열매를 매달고 있는 이 나무 아래서 정체 모를 나무에 .. 2022. 3. 23.
07. 애도의 선물로 찾아온 인연 아카시꽃 향기가 흥건하던 더없이 좋은 날에 아버지를 영원히 떠나보내고 나는 골방에 처박혀 보냈다. 보냈다기보다는 견디는 시간이었다. 죽음과 애도에 관한 책을 수없이 읽었지만 막상 내 앞에 닥치고 보니 속수무책이었다. 더디게 가는 시간을 견디며 아버지 사십구재까지 지내고 나서 오랜만에 아래층에 사는 언니를 만났다. 이미 늦었지만 더 늦어지면 서운해할까 봐, 그동안 아버지 장례를 치렀노라고 했다. 순간 언니의 큰 눈이 촉촉해지더니 의자를 가까이 끌어당기며 두 손으로 내 손을 가만히 감싸 안았다. “…….” “그리 큰일을 치렀구나.” “…….” 볼 일을 마치고 밥때가 되어 점심을 먹고 났을 때 언니는 별일 없으면 함께 갈 데가 있다고 했다. 사고 싶은 식물이 하나 있는데 수형을 좀 봐달라며 바람도 쐴 겸 화원.. 2022. 3. 22.
02. 쏟아진 한 끼, 쏟아진 눈물 아기와의 시간은 행복하면서도 힘든 시간의 연속이었다. 갓난아기는 삼시 세끼만 먹는 게 아니다. 서너 시간 간격으로 분유를 먹여야 하고, 수시로 기저귀도 살펴 갈아줘야 한다. 그러니 엄마인 내가 밤잠을 이어서 잔다는 건 생각할 수 없다. 하루하루가 쪽잠이고 선잠이다. 게다가 집안일은 얼마나 서툰지 하루 24시간이 서툰 일과의 사투였다. 저녁은 퇴근한 남편이랑 먹느라 어떻게 준비한다고 해도, 나머지 시간에 나를 위한 식사를 따로 준비한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뱃속이 이런 사정을 헤아려줄 리 없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배가 고프다는 신호가 강하게 온다. 그런 날이 반복되던 어느 날이었다. 내게도 밥을 줘야 하는데 집에 마땅히 먹을 것이 없었다. 나는 컵라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아기가 자는 틈에 .. 2022. 3. 21.
06. 비켜나 있음의 쓸모 오늘은 어떤 아이에게 물을 줄까? 눈과 귀를 활짝 열고 조심조심 베란다 식물들 사이를 돌아보는데 이번에는 찔레꽃이 말을 걸어온다. 자신은 사고파는 상품이 아니라서 사진 한 번 찍어 주지 않느냐고. 오, 미안 미안해. 서둘러 찔레꽃을 포토존(고등학생 딸이 졸릴 때 서서 공부하는 하얀 스탠딩 책상인데, 가끔 식물을 올려놓고 사진 찍는 포토존으로 이용하고 있다)에 올려놓고 찬찬히 들여다본다. 찔레꽃, 너는 어디서 왔더라? 아, 맞다! 벌써 십 년이 족히 넘었겠구나. 친정집에 갔을 때 일이다. 아침밥 드시라고 밭일하는 아버지를 모시러 논두렁 사잇길을 설렁설렁 걸었다. 마침 아버지가 일하는 밭 옆에는 하얀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아직 이슬도 채 가시지 않은 살짝 이른 아침, 새소리로 가득한 산골짝에서 .. 2022. 3. 21.
05. 나의 친애하는 나무에게 전하는 말 도시에 살면서 나는 자작나무와 사랑에 확 빠졌다. ‘도시에 살면서’라는 말은 내가 살던 시골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는 뜻이다. 있었다 해도 그때는 관심 밖이었을 것이다. 잔가지 없이 곧게 뻗은 몸통을 감싼 하얀 수피, 잎자루가 길어 여린 바람에도 파샤샤파샤샤 팔랑이는 연초록 이파리들, 그리고 무엇보다 이파리 뒷면에 살짝 숨겨둔 은빛의 찰랑거림. 자작나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나무는 단연코 자작나무였다. 누군가를 천천히 알아갈 무렵 자작나무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그 사람이 확 좋아졌고, 우리는 자작나무에 대해 길고 긴 수다를 떨기도 했다. 강원도 인제의 자작나무숲을 다녀와서는 나중에 꼭 함께 걷자는 약속도 했다. 누군가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봤다던가,.. 2022. 3. 19.
00. <너 오랫동안 이런 걸 원하고 있었구나> 연재 예고 꼬꾸라져도 그 순간 나를 잡아주는 것이 있다면 “어른이 되면 나아질 거야.” “언제 어른이 되는 걸까?” “어른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걸까?” 어른이지만, 여전히 성장 중인 우리에게 작가는 ‘나 또한 그러하다’고 자신의 지난 이야기와 지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가정과 사회에서 온전히 한 사람 몫을 하며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우리에게 따뜻한 응원과 격려를 보낸다.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부딪히기도 하고, 상처를 주거나 받기도 한다. 가족처럼 너무 가깝거나 잘 알아서 그러고, 때론 너무 뭘 몰라서 그런다. 상황과 상대를 원망하고, 자신을 자책하기도 하다 ‘어른이 되면 나아질 거야’라고 마음속으로 자신을 다독여본다. 하지만 쉽사리 어른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어른이 된다는 건 무엇이며, 어른은 완벽.. 2022. 3. 17.
02. 시간을 가장 우아하게 잃어버리는 방법 우리 집 현관을 나서면 1분 만에 도착하는 오솔길. 아파트가 아니라면 우리 집 마당이나 다름없는 곳.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볼 만큼 높이 자란 나무들이 아치를 이루어 내가 나무 터널이라 부르는 곳. 이 숲길을 매일 걷고 또 걷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감사의 마음이 쌓인다. 자연이 누구의 소유가 아니라서, 시간을 내어 눈길을 주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자연이라서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자연에 대해 각별히 놀라워할 줄 아는 눈을 가진 나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나는 오늘도 자연에 깃든 하늘, 바람, 나무, 풀, 새들, 고양이와 눈 맞춤 하느라 느릿느릿 걷는다. 느린 걷기는 내가 시간을 가장 우아하게 잃어버리는 방법이다. 햇살 좋은 날에는 그림자와 함께 걸었고 눈이 오는 날에는 설렘으로 걸었다. .. 2022. 3. 16.
01. 창이 있는 부엌으로의 여행 내 집은 없지만 나만의 풍경을 품은 부엌 창이 있다. 오늘 표정은 햇살을 가득 머금고 무꽃처럼 방긋 웃고 있다. 눈 내리는 표정도 좋고 비가 내리는 날엔 비가 내려서 좋고 바람이 몰아치는 날이면 바다의 파랑 같은 나무의 출렁거림이 좋다. 감각할 수 있어서 좋다. 창턱에는 단아한 옹기 항아리와 보랏빛 나팔꽃과 다섯 살 딸이 빚은 고양이 도자기와 바닷가에서 주워온 조개껍데기와 돌멩이, 메타세쿼이아 열매로 만든 줄 커튼. 창 너머로는 버드나무, 아그배나무, 벚나무, 메타세쿼이아, 얼마 전에 이사한 건물 옥상 위의 고양이 가족. 저 멀리 자그마한 숲. 내 집이 아니어도 부엌 창이 있는 집이라면 그런대로 괜찮다. 1794년에 쓰인 드 메스트르의 『내 방 여행하는 법』은 지금 읽어도 흥미롭다. 아니, 어쩌면 여행과.. 2022. 3. 15.
00. <겨우 존재하는 아름다운 것들> 연재 예고 제님 식물 에세이 책 모임에서 떠난 1박 2일 모꼬지에서 한 후배가 말했다. “나도 제님 언니처럼 한들한들 도서관 다니고 그림책 보며 여유롭게 살고 싶어.” 뜻밖이었다. ‘사람들에게 내가 그리 보였구나.’ 나는 할 말을 잃고 그저 빙그레 웃었다. 그 당시 나는 불행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었으니까. 나의 속내를 얘기하자면 1박 2일이 아니라 며칠 밤으로도 모자랄 테니까. 아이와 그림책으로 더없이 행복한 시절을 보내고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그즈음부터 나는 내내 불행하기 시작했다. 더 정확히는 생각 속에서 온통 불행했다. 육아를 핑계로 잠깐 미뤄두었던 나의 꿈은 어찌해볼 도리 없이 멀리 달아나 있었고, 동시에 엄습하듯 찾아온 공허와 불안은 얄팍한 자존감마저 추락시켰다. 하루하루 열심히 성실하게 살면 지.. 2022. 3. 14.
08. 베네치아_물 위의 도시에서 어느 날과 그 다음날. 그 둘이 완벽하게 다른 날이 되기도 한다. 가까이 존재하던 이가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졌을 때, 나는 이전의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래도 삶은 계속되고, 그래서 나는, 달라진 나인 채로 여행을 떠났다. 1년 전에 숙소를 예약해 둔 곳이 두 번째 찾는 베네치아였고, 하필 찬 바람부는 가을이었고, 늦은 오후 산타 루치아 역에 도착해 어두운 호텔 방에서 불면의 밤을 보내고 나니 도시가 바닷물에 잠겨 있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아쿠아 알타(Acqua alta)인가. 전날의 베네치아와 완전히 다른 베네치아에서, 나는 어디로 향하든 막힌 길을 돌아 오래도록 걸어야 했고, 무엇을 하든 물 위에 서 있어야만 했다. 그래도 삶이 계속되었던 것처럼, 그래도 어딘가에 길이 있었다. 이러다.. 2022. 3. 14.
07. 피렌체_어느 실업자의 죽음 유배지 같은 그 시골 마을에서, 저녁이면 푸줏간 주인이나 벽돌공들과 어울려 카드놀이를 하고 사소한 다툼을 하며 불한당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던 그의 편지는 몹시 마음 아픈 구석이 있다. 그렇게라도 또 다른 일상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밤이면 몸을 정제하고 관복으로 갈아입은 후 서재에서 글을 써 내려간 마키아벨리. 그렇게 보내는 네 시간 동안 “모든 고뇌를 잊고, 가난도 두렵지 않게 되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느끼지 않는다”던 그는 위대한 정치 철학자이자 위태로운 조국 이탈리아를 걱정한 사상가였음이 틀림없지만, 어쩌면 평범한 생활인으로 살아가기를 가장 열망했을지도 모르겠다. 철저히 현실적이고 계산된 정치론으로 인해 권력자들을 위한 조언자, 권모술수를 가르치는 악의 화신으.. 2022. 3. 12.
04. 우체국의 마리 아줌마 동화작가의 영혼을 가진 우체국 아줌마와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에는 여러 버전이 준비되어 있다. 왜냐하면 아줌마와 나는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편집하는 능력을 즐기기 때문이다. 마치 하루종일 노래하는 새처럼 우리는 서로의 머리 위로 말풍선이 떠다닌다는 걸 첫눈에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우체국 아줌마는 시간여행자로서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를 만나러 온 것 같았다. 우리는 마주 본다. 그리고 정해진 대사를 정해진 순서에 따라 말한다. 마치 운명처럼. “80엔입니다.” 우체국 아줌마가 창구에서 국제우편에 도장을 찍으면서 말한다. 내가 동전을 세어서 건네주자 우체국 아줌마가 누구에게 그렇게 편지를 쓰는가 묻는다. “가족과 친구들이요.” 어느 날인가 한국으로 보낼 편지를 들고 오치아이 우체국 창구에 줄을 서 있자 우체.. 2022. 3. 12.
02. 오치아이의 방 방 하나를 소유한다는 것, 그것도 이국에서 자신의 몸을 눕힐 방 하나를 가진다는 건 생각했던 것보다 쉬웠다. 그것은 까다로운 일본의 부동산 문화 때문이었다. 계약 기간이 만료되기 전에 이사를 가고 싶었던 오치아이의 방 세입자가 집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와 새 계약서를 썼다. 나는 4조반의 다다미방을 얻기 위해 선불 월세 2만9천 엔과 보증금 2만9천 엔, 그리고 방을 빌려주어서 감사하다는 명목의 ‘레이킹’으로 5만8천 엔을 지불했다. 엔화 환율을 100엔 기준 1000원으로 했을 때 약 120만 원 정도를 가지고 방을 얻는 데까지는 좋았으나, 그 방에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벗어날 수는 없었다. 눈을 감으면 오치아이의 네모난 방 하나가 떠오른다. 다다미 4조반의 공간에 한국에서 가져온 솜이불 한 채가 .. 2022. 3. 10.
01. 헌책방 시바타 아저씨 헌책방 아저씨는 낡은 다다미방에서 개 한 마리와 생활했다. 아저씨는 늘 술에 취해 있었다. 작은 헌책방 안은 정리가 안 된 책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가끔 가격을 물으며 아저씨를 바라볼 때면 장사에는 통 관심이 없다는 얼굴로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지금 생각하면 책 뒤에 연필로 가격이 적혀 있었는데 나는 왜 몰랐을까. 아니면 적혀 있지 않은 책도 있었던 걸까. 니혼대학 예술학부 청강생 시험을 통과하고 6개월 만에 어학원을 졸업한 나는 대학에서 청강하고 있는 다섯 과목을 듣는 것 이외에는 아무 할 일이 없었다. 하루종일 말 한마디 안 할 정도로 고독한 시간. 이어령 선생님의 『축소지향의 일본인』 일본어판을 서점에서 산 것도 그때 즈음이었다(이 책은 시미즈 선생님이 빌려 가서 내가 귀국한 후에야 돌려주었.. 2022. 3. 8.
00. <동경인연> 연재 예고 동경인연(東京因緣)에 대하여 우리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의미를 깨닫는다. 그 시절 그곳 그 인연은 그저 추억의 한 자락으로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완성해주는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이 되기도 한다. 일본문학 번역가이자 에세이스트인 이은주는 『나는 신들의 요양보호사입니다』와 『오래 울었으니까 힘들 거야』에 이은 세 번째 에세이 『동경인연』에서 삶의 큰 강을 건널 용기를 주었던 젊은 날의 한 페이지를 열어 보인다. 그 속에는 문학이 있었고, 열정과 우정이 있었고, 배려와 사랑이, 사람들이 있었다. 이은주의 청춘의 키워드는 문학과 일본이었다.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에도 주저앉지 않고 도전정신으로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동경의 오치아이 4조반 다다미방을 거처로 삼고, 일본대학 예술학부 문예학과에서 문.. 2022. 3. 7.
04. 보이후드 영화 는 로 익숙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작품이다. 2015년 1월 신촌의 작은 극장을 홀로 찾아 처음 이 영화를 보았다. 오전 첫 회차인 조조 상영이라 관객은 두엇뿐이었다. 바깥이나 극장 안이나, 날씨도 분위기도 을씨년스럽기가 하나같았다. 그러나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세상은 두 시간 전에 비해 훨씬 푸근했다. 마음 한편에 보드랍고 말랑한 감정들이 몽글몽글 덩이지는 걸 느꼈다. 독특하고 새로웠다. 새해 벽두였지만 조급하게도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올해 최고의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먼 훗날 인생영화를 꼽더라도 가뿐하게 베스트10 안에 들지 않을까! 한두 달 동안은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게 이 영화를 꼭 봐야 한다며 영업을 하고 다녔다. 는 평단으로부터 받아 낸 융단 호평으로도 유명하다. 한 영화평론가.. 2022. 2. 18.
00. <아빠의 비밀일기> 연재 예고 싱글대디 좌충우돌 성장에세이 ‘이 미숙한 것들한테 어떻게 세상을 맡기나?’ 걱정이 태산 같을지 모르나 천만의 말씀이다. 자고이래 세상은 늘 젊은이들의 것이었다. 깔고 앉은 자리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새로운 임자에게 제때 비켜주지 못하는 자를 일컬어 세상은 꼰대라고 부른다. 변화의 흐름에 올라타지 못하면 자기만 외롭고 힘들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붙잡고 늦추고자 한다면 끊임없이 학습하고 적응하는 방법밖에 없다. 내게 미래란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다. 꿈꾸는 내일임과 동시에 받아들이고 적응해야 하는 숙제이기도 하다. - 본문 「꼰대의 시간은 흐른다」 중에서 ‘아이라는 선물’을 받은 젊은 아빠의 한없이 신기하고 벅찬 감정으로 책은 시작된다. 그러다 어느새 사춘기 아이들의 질풍노도에 하릴없이 나부끼는 고단한 중년.. 2022. 2. 14.
10. 다시, 제주살이의 시작 (마지막 회) 아침 9시. 제주행 배편이 있는 완도의 하늘은 맑았고, 바람은 잔잔했다. 숙소를 나와 두 달 치의 짐이 가득 실린 차를 몰아 완도항으로 갔다. 평온한 바다 위로 우리가 타고 갈 여객선의 모습이 보였다. 안내자의 수신호에 따라 차량을 선적하는 배 밑 후미로 이동했다. 배 안쪽엔 이미 우리와 함께 제주로 갈 차량이 줄지어 있었다. 이제 채워지고 있는 줄을 따라 뒤쪽에 차를 세웠다. 차량을 통제하던 사람들은 능숙하게 차바퀴에 줄을 묶어 배 바닥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이제 배 타고 조금만 가면 제주야.” 6년 만의 제주였고, 결혼 이후 처음 가는 제주였다. 집을 나와 첫 독립생활을 하고, 아내를 만나고, 곳곳을 다니며 연애를 하고, 평생 함께할 결심을 했던 곳. 아내와 술이라도 한잔할 때, 어느 정도 취기가 .. 2022. 2. 4.
00. <조금 이른 은퇴를 했습니다> 연재 예고 불확실한 미래와 실패가 두려운 당신께 전하는 공감 에세이 거북이, 고양이, 그리고 아내... 나를 행복하게 하고 끌어당기는 것들의 힘 40대 ‘조금 이른’ 은퇴를 결심하게 된 계기와 과정, 그리고 은퇴 이후의 소박한 일상이 이 책의 중심축이다. 버티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직장 생활 이야기와 아내와 함께 구상한 은퇴 계획은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 봤을 법한 이야기들이다. 은퇴 이후 저자는 가고 싶었던 카페를 간다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며 일상을 채워나간다. 그렇게 쌓이는 시간은, 하루하루 버텨낸 것만으로 만족하던 때의 시간과는 분명히 다를 거라고 기대한다. 저자는 회사에 얽매이지 않아 자유분방한 일상이 쌓이게 되면, 그 긴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는 무언가가 분명 있을 거라고 믿는다. 저자는 어릴 때부터 .. 2022. 1. 19.
00. <그림에 끌리다> 연재 예고 모든 순간이 그림이 되는 삶에 대해 우리가 만날 그림은 어떤 계절일까…. 마음이 기억하는 그림에는 분위기가 있다. 그림은 모든 순간에 함께 있다. 굳이 미술관에 들르지 않더라도 미디어를 통해 누구나 명화를 접할 수 있는 세상이다. 무수히 접했던 많은 그림 중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눈에 밟혔던 그림이 있을 것이다. 그림 속의 모델에게 강렬한 끌림이나 감정적 동요가 일어나기도 한다. 모딜리아니의 영원한 모델, 잔느의 긴 목과 텅 빈 눈에서 슬픔을 느낀다. 샤갈이 사랑하고 추억했던 날아다니는 벨라에게서 사랑의 설렘을 느낀다. 존 밀레이가 그린 눈먼 소녀의 평온한 미소에서 현실이 힘들 때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는 희망을 느낀다. 존 클리어의 가냘픈 선으로 묘사된 고다이바의 누드화에서 애처로움을 넘어선 숭.. 2020.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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