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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추천30

09. 이미 충분히 살았습니다. 이미 충분히 살았습니다. 유서 속의 그 한 문장이 도우코의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게다가 그 글씨─. 유서는 블루블랙 만년필로 쓰여 있었다. 도우코가 어릴 적부터 받아 온 많은 편지도 그러했다. 굵직굵직하면서도 특유의 둥그스름한 느낌이 나는 부드러운 그 글씨. 두 번 확인할 것도 없이 도우코가 아는 치사코 씨 그 자체여서 치사코의 인품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데다 거의 체온과 육성까지 동반하여 도우코를 동요하게 만들었다. 고인과 마지막으로 만난 때가 언제이며 전화 통화 외에 마지막으로 이야기 나눈 게 언제인지, 어떤 내용의 이야기였는지, 최근 들어 달라진 점은 없었는지, 고인과는 친했는지, 다른 두 사람에 대해 뭔가 들은 이야기가 있는지─. 이런 경우, 경찰에는 질문의 수순이란 것이 있을 테니 어쩔 수 없.. 2022. 9. 30.
05. 이곳에는 일상이 있고 세상은 여느 때처럼 움직이고. 새해 첫날 밤부터 문을 여는 바(Bar)를 가와이 쥰이치는 한 곳밖에 알지 못한다. 도저히 바로 집에 들어갈 기분이 아니어서 집에선 더 멀어지지만 전철을 타고서 강변에 오도카니 자리한 그 가게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카운터석에 앉아 위스키를 주문한다. 정월 초하룻날부터 밖에서 술을 마시는 인간이 그리 흔할까 싶었는데 예상은 빗나가고 좁은 가게 안은 손님들로 복작였다. 하지만 쥰이치에게는 오히려 감사한 일이었다. 적어도 이곳에는 일상이 있고 세상은 여느 때처럼 움직이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어쩐 일로 혼자시네요.” 젊은 바텐더의 그 말에, “응. 뭐.” 라고 대답은 했지만 실은 혼자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혼자로 보이겠지만 츠토무라는 남자와 함께라고. 술잔을 아주 살짝 들어 올렸다. 헌배가 아니라 건.. 2022. 9. 26.
04. 치사코 씨가 떠나 버렸다. 도우코가 알게 된 것은 그게 다였다. 점심상은 호화로웠다. 떡국과 설음식 외에 고기 요리 두 종류와 샐러드 두 종류가 올라오고, 동글동글한 방울 초밥까지 나왔다(“많이 만들어 놨으니까 괜찮으면 나중에 싸 갖고 가게나.”). 별로 잘하지 못하는 술을 마시면서 나는 묵묵히 음식을 먹었다. “그러고 보니, 누님 또 책 나왔던데.” 장모가 불쑥 말했다. “그렇습니까?” 누나하곤 십 년 넘게 얼굴을 못 봤고 그럭저럭 이름이 알려진 작가인 듯한 누나의 저서도 나는 읽어 본 적이 없다. “신문에 광고가 났더라고. 얼굴 사진까지 넣어서.” “네에.” 나는 짧게 대답했다. 식사를 마치고 장인이 TV를 켜자 갑자기 끔찍한 뉴스 속보가 자막으로 흘러나왔다. 도내 호텔에서 노인 셋이 엽총으로 자살했다는 내용이었다. “뭐야. 무서워.” 리호가 말했다. 자막은 짧고.. 2022. 9. 25.
03. 이미 우리 가족은 와해되고 말았다. 아내가 검정 레이스 속옷(이란 요컨대 브래지어와 쇼츠)만 걸친 모습으로 커다란 코끼리를 타고 앉아 뒤에 많은 늑대를 거느린 채 거리를 행진하면서 길가의 나를 내려다보며 우아하게 미소 짓는다. 그와 같은 기묘한 꿈을 꾸고 눈을 뜨자 곁에 아내의 모습은 없고 시트와 베개만 놓여 있었다. 창밖은 이미 해가 떠올라 밝다. 아내는 거실에 있었다. 제대로 옷을 갈아입고서(나로 말할 것 같으면 파자마에 플리스를 걸쳤을 뿐이다)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잘 잤어? 새해 복 많이 받아.” 지난밤, 날짜가 바뀐 순간에 TV(새해맞이 카운트다운은 TV도쿄를 보며 맞이하는 것으로 정해 놓았다. 화려한 악기 소리가 좋다)를 보면서 건배하고 새해 인사도 입에 올렸지만 더욱 확실히 다지기 위해 다시 한번 말했다. “맥주.. 2022. 9. 23.
00. <본삼국지 3> 연재 예고 천하 셋으로 나누다, 중국 12판본 아우른 세계최고원본! 할아버지와 아버지, 손자가 함께 읽는 ‘3대 삼국지’ 드디어 등장 ‘일생에 세 번은 반드시 삼국지를 읽어야 한다.’ 예로부터 내려온 말이다. 청소년 때에 한 번, 성인이 되어 한 번, 나이가 들어서 한 번은 읽어야 삼국지의 참된 교훈을 배워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중국에는 삼국지를 일생에 열 번 이상 읽은 애독자도 참으로 많다. 삼국지는 재미와 교훈과 감동이 넘쳐나,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생의 지침서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는 지금까지 이렇게 여러 번 읽을 만한 충실한 삼국지가 없었다. 50종이 넘는 삼국지가 쏟아져 나왔으나 오래 간직하면서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볼 만큼 제대로 옮겨진 책이 없었다. 1.. 2022. 9. 1.
11. 생일·세 번째 제 11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실패한 작전은 없다. 다만 성공하지 못한 작전이 있을 뿐 …! 드디어 제 생애의 최고로 멋진 작전이 실행 직전에 있습니다. 그녀는 저를 한 걸음 차이로 뒤따라오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예전에 많이 와 봤던 길이라 익숙하지만 그녀는 처음 오는 길이다보니 어둠 속에서 발을 자꾸만 헛딛더군여. “야~! 조심해!” “머야? 이렇게 껌껌한데, 대체 어딜 가는 거야?” “그냥 쪼오기~.” “쪼오기라니 …?” “야앗~! 조심해~!” 쿠우응~!!! 으헉! 그녀가 엎어졌습니다. 이런 제길! 머냐? 이러면 안되는데 …. 얼른 그녀에게 다가갔습니다. “괜찮어?” “으 …우웅 …괜찮어.” “조심 좀 해.” “니가 껌껌한 데로 끌고 가니깐 그렇지!!!” “바보냐? 다 큰 게 넘어지기나 하고.”.. 2022. 6. 30.
08. 길들여지기 제 8화 만남은 가끔씩 서로에게 길들어지기를 요구하기도 한다. 저는 그녀의 터프함과 동해 번쩍 서해 번쩍에 질려 있었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녀가 언제 어디서 사고를 칠지 모르는데다가 언제나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 “몇 분 안에 어디로 안 나오면 죽는다!!”라고 해대니 어떡합니까! 혹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돌발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뭔가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습니다. 기르는 애완용 고양이라면 방울을 달아주면 됩니다. 강아지라면 집 전화번호를 적은 목걸이라도 하나 걸어 주면 됩니다. 어라라~!! 집 전화번호를 적은 목걸이!!! 그렇습니다~! 오예에~! 그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으하하핫~!! “나 견운데, 오늘 저녁에 좀 보자.” “오늘 저녁에?” “그래! 내가 너.. 2022. 6. 27.
04. 이제는 내 정체를 완벽히 은폐할 수 있겠구나 두 번째 수기 바닷가. 파도가 들이친다고 해도 될 정도로 바다와 가까운 물가에, 새카만 나무껍질의 커다란 산벚나무가 스무 그루 넘게 쭉 서 있습니다. 새 학년이 시작되면 산벚나무는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끈끈한 갈색 어린잎과 함께 그 화려한 꽃을 피우고, 얼마 후에 꽃잎이 눈처럼 날릴 때에는 수많은 꽃잎이 바다에 흩뿌려져서 수면을 아로새기며 떠돌다가, 파도에 실려 다시 바닷가로 밀려오지요. 그 벚꽃으로 뒤덮인 모래밭을 그대로 교정으로 사용하는 도호쿠의 어느 중학교에 저는 입시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 그럭저럭 별일 없이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 중학교의 교복 모자 배지에도, 교복 단추에도 벚꽃 그림이 피어 있었습니다. 그 학교 바로 근처에 저희 먼 친척분이 살고 계셔서, 아버지가 제게 그 바다와 벚.. 2022. 6. 27.
07. 석촌호수 제 7화 타인의 아픔을 같이 느낄 순 없을까? 그녀는 주말이 아니면 수요일에 저를 만나려고 합니다. 특히 수요일에는 거의 백퍼센트! 그녀한테 연락이 온다고 알고 있으면 됩니다. 왜냐구여? 그녀는 수요일에 학교수업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번 수요일에 그녀가 우리학교에 와서 난장판을 쳐놓고 갔기 때문에 전 수요일에 들어있는 강의는 안 듣습니다. 아니 못 듣습니다. 등록금이 대체 얼만데 …. 돈 아까워 죽습니다. 오늘은 수요일~! 수요일엔 오뚜기 카레~! 아닌감 …? 저는 지금 학교에 가는 걸 일찌감치 포기하고 집에서 대기 중 입니다. 사전에 그녀의 연락은 당근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녀가 저희 집 근처에 와서, ‘일 분 안에 안 나오면 죽는다!!! 라고 하면 전 1분 안에 그.. 2022. 6. 26.
03. 저에게는 둘 중의 하나를 고르는 능력조차없던 것입니다. 첫 번째 수기 저희 아버지는 도쿄에 업무가 많은 분이어서 우에노의 사쿠라기초에 별장을 갖고 계셨습니다. 한 달에 반 정도는 도쿄의 그 별장에서 지내셨지요. 그리고 돌아올 때는 가족과 친척에게까지 그야말로 엄청나게 많은 선물을 사다 주시는 것이 뭐랄까, 아버지의 취미 같은 것이었습니다. 언젠가 도쿄에 가시기 전날 밤, 아버지는 아이들을 응접실에 모아두고 이번에 돌아올 때는 어떤 선물을 갖고 싶은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웃으며 물으시고는 그에 대한 아이들의 대답을 하나하나 수첩에 적으셨습니다. 아버지가 이렇게 아이들을 다정하게 대하는 건 드문 일이었습니다. “요조는 뭘 갖고 싶니?” 아버지가 이렇게 물으시자 저는 말문이 막혀서 우물거리고 말았습니다. 뭐가 갖고 싶냐는 질문을 들으면 저는 아무것도 갖고 싶어지.. 2022. 6. 26.
05. 인연·세 번째 제 5화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들은 우리도 모르는 성욕일수도 있다. 하지만 … 멀쩡한 남녀가 소주방에 들어간 지 20분도 안되어 남자가 여자를 업고 나오는 광경이란 …!!! 으으 … 종업원이 먼 가 수군거리는 듯 합니다. ‘야, 약 먹였나봐 …!’ 헉 …! 뭡니까? 약을 먹이다니!!! 주위가 깜깜해서 다행입니다. 막상 그녀를 들쳐 업고 밖으로 나왔지만 어떻게 해야 하나 아무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어쩔 수 있습니까?? 한번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해본 대로 하는 수밖에 …. 갔습니다!! 어젯밤 그 여관을 …. 역시 어젯밤 그 아줌마가 우리를 맞으시더군여. 절라 친한 척 합니다. “엇, 학생!! 또~오 왔네?” “네, 안녕하세요? 아줌마.” “오늘도 색시가 떡이 됐네. 푸하하핫!” “ …….” “얼른 .. 2022. 6. 24.
01. 서문 나는 그 남자의 사진 석 장을 본 적이 있다. 한 장은 그 남자의 유년 시절이라고 해야 하나? 열 살 전후로 추정되는 사진인데, 그 아이가 많은 여자에게 둘러싸여(아마 그 아이의 누나들, 여동생들, 그리고 사촌들인 것 같다) 정원의 연못 근처에서, 굵은 줄무늬 하카마를 입고 고개를 30도 정도 왼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이고 서서 흉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다. 흉하게? 하지만 무딘(말하자면 아름다움과 추함 따위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귀여운 꼬마네요.’ 라고 적당히 입에 발린 말을 해도 아주 빈말로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소위 말하는 세속적인 ‘귀여움’이 그 아이의 얼굴에 있기는 하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내공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얼굴을 한 번 보고 바로, ‘뭐.. 2022. 6. 23.
02. “태워버리자.” 어떤 참을 수 없는 부끄러운 생각이 덮쳐 오면, 그 기묘한, ‘아’ 하는 희미한 소리가 터져 나오곤 했다. 방금 내 가슴에 불쑥, 6년 전 이혼하던 때의 일이 선명하게 떠올라 견딜 수 없어져서, 나도 모르게 ‘아’ 소리가 새어 나온 건데, 어머니는 무슨 이유였을까? 어머니한테 나처럼 부끄러운 과거가 있을 리는 없는데. 아니, 어쩌면, 뭔가 있는 건가. “어머니도 방금 뭔가 떠오르신 거죠? 뭐예요?” “잊어버렸어.” “저랑 상관있는 일이에요?” “아니.” “그럼 나오지랑 상관있는 거예요?” “그럴…….” 어머니는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갸웃하더니, “지도 모르지.”라고 하셨다. 동생 나오지는 대학에 다니다 징집되어 남방의 섬으로 갔는데, 소식이 끊겨버린 통에 전쟁이 끝났는데도 찾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이.. 2022. 6. 17.
01. 우리 집안에도 진짜 귀족은 어머니뿐일 거야 “아.” 아침에 식당에서 수프를 한 수저 살짝 떠 드시던 어머니가 희미하게 외마디 소리를 내셨다. “머리카락?” 수프에 뭔가 불쾌한 거라도 들었나 싶었다. “아니.” 어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사뿐히 수프를 한술 입에 흘려 넣으시고는, 새초롬하게 고개를 옆으로 돌려 부엌 창문 너머 활짝 핀 산벚꽃을 바라보더니, 그렇게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다시금 사뿐히 수프 한 입을 조그만 입술 사이로 미끄러트리듯 넣으셨다. 사뿐히, 라는 표현은 어머니에게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여성 잡지 같은 데서 나오는 식사법과는 완전히 다르다. 언제가 남동생 나오지가 술을 마시면서 누나인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작위(爵位, 1869년부터 1947년까지 존재했던 일본의 귀족 제도. 공작·후작·백작·자작·남.. 2022. 6. 16.
01. 다스 게마이네_당시, 내게는 하루하루가 만년(晩年)이었다. 1. 환등(幻燈) 당시, 내게는 하루하루가 만년(晩年)이었다. 사랑을 했다. 태어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전에는 내 왼쪽 옆모습만을 보이며 나의 남자다움을 내세우고자 조바심을 냈고, 상대가 단 일 분이라도 망설이면 나는 금세 어쩔 줄 몰라 하며 거센 바람처럼 달아났다. 하지만 당시 매사에 야무지지 못했던 나는, 내 몸에 달라붙어 있다고 여긴, 상처를 최소화하는 그 현명한 자기방어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이른바 절도 없는 사랑을 했다. 사랑하니까 어쩔 수 없다는 목쉰 중얼거림이 내 사상의 전부였다. 스물다섯. 나는 지금 태어났다. 살아 있다. 끝까지, 살아가리라. 진심이다. 사랑하니까 어쩔 수 없다. 그런데 나는 처음부터 환영받지 못했던 듯하다. 정사(情死)라는 낡은 개념을 몸으로 서서히 이해하기 시작했.. 2022. 6. 6.
00. <달려라 메로스> 연재 예고 다자이 오사무의 새로운 매력이 담긴 아홉 개의 반짝이는 조각들 역자 후기 이 작품집에는 표제작인 「달려라 메로스」를 포함하여 다자이 오사무가 1935년부터 1943년까지 발표한 총 아홉 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각각 독립된 단편으로 이루어진 작품집이라 사실 처음부터 읽지 않아도 크게 상관은 없지만, 다자이의 미묘한 내면의 변화를 느껴보고 싶다면 이 책에 소개된 작품 순서대로 차근차근 읽어볼 것을 추천합니다. 먼저 첫 번째 단편 「다스 게마이네」는 1935년 10월 에 발표된 작품입니다. ‘다스 게마이네(Das Gemeine)’란 독일어로 ‘통속성, 비속성’을 뜻합니다. 이 소설은 다자이 오사무를 비롯한 제1회 아쿠타가와상 후보자 네 명이 의 청탁을 받아 쓴 것으로, 소설 속에도 ‘해적’이라는 잡지를 .. 2022. 6. 3.
10. 15분마다 해야 해요. 그 시간이 지나면 안 돼요. (마지막 회) “그 강박장애에 대해 말해보렴.” 에릭은 맥스가 한 말을 그대로 따라했지만, 곧이곧대로 믿는 건 아니었다. 진단을 내리기에 앞서 맥스의 가족력이나, 생물학적 취약점에 대해 알아야만 했다. 청소년기 후반과 이른 성년기는 위험한 시기였다. 특히 남자아이들에게는. 보통 맥스 정도 되는 나이에 조현병이나 양극성 장애가 ‘최초의 발현’을 시작한다. “패리시 선생님, 약을 좀 처방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조사를 해봤더니, 강박장애에는 약이 도움이 된대요. 아닌가요?” “그렇긴 하지.” 지금 같은 상황은 진료를 하다 보면 노상 겪는 일이었다. 약이 있으면 환자들은 약을 원한다. 에릭은 투약에 반대하는 건 아니었지만 반드시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약을 처방하지 않았다. 특히 청소년한테는. “강박장애에는 루복스하고 팍실이 .. 2022. 5. 20.
09. 강박장애가 있어요. 다음 날 아침, 에릭이 문을 열자 맥스 자보우스키가 대기실 나무 의자에 구부정하게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맥스? 어서 와라.” “안녕하세요.” “찾아오는 데 힘들진 않았고?” “네. GPS를 이용했거든요.” “그랬구나. 어서 들어오렴.” 에릭이 열려 있는 상담실 문을 가리키자, 맥스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에릭은 맥스가 병원에서 봤을 때보다 고민이 더 많아 보인다고 생각했다. 맥스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잠을 별로 자지 못한 것처럼 눈 밑이 검었다. 앞머리 아래로 보이는 이마를 잔뜩 찡그리고 있는 것이 기분이 많이 안 좋은 것 같았다. “패리시 선생님, 만나주셔서 감사해요.” 상담실 가운데 멈춰 선 맥스가 말했다. 조심스러우면서도 고마워하는 눈빛이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맥스의 피부는 .. 2022. 5. 19.
08. 나는 가치가 없고 나약하고 부족한 누군가를 파멸시킬 것이다. 3. 나는 거짓말을 하는 게 쉽다. 그리고 거짓말을 잘한다. 선택하시오 : 전혀 그렇지 않다 / 조금 그렇다 / 그렇다 잠이 오지 않는다. 마음이 너무 들뜬다. 나는 첫 번째, 어쩌면 가장 큰 장애물을 해결했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해냈다. 적과 관계를 맺은 것이다.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는다. 스릴과 흥분을 느낀다. 너무 신이 나서 긴장될 정도다. 조금 더 심하게 말하면 기대감에 들떠 있다. 침대 옆에 놓여 있는 시계는 새벽 3시 2분을 가리키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좌우로 돌아누우며 몸을 들썩거리고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 에어컨을 켜고, 손잡이를 HI로 돌렸다가 이내 LO로 돌린다. 어째서 이런 것에 철자도 제대로 쓰여 있지 않는 건가? 멍청이들. 나는 온라인에 접속해 비디오 게임을 시작한다... 2022. 5. 18.
07. 가장 힘든 건, 스스로 찾아온 사람만 도와줄 수 있다는 것 “맥스.” 에릭은 자판기 앞에 멍하니 서 있는 맥스에게 다가갔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이 유리창에 비쳤다. 맥스가 돌아섰다. “어떻게 됐죠? 할머니를 도와주실 수 있겠어요? 할머니의 기분이 나아질 만한 처방을 해주셨나요?” “할머니가 우울증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건 알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아.” “어째서요?” “진찰을 해본 결과, 네 할머니는 이런 상황임에도 아무런 이상이 없어. 특별한 분이시지…….” “그럼 영양 보급관은요?” 맥스가 항의가 아닌 애원하는 듯한 눈으로 물었다. “우울증이 아니라면 어째서 영양 보급관을 거부하시는 거죠? 그걸 달지 않겠다는 건 자살이나 마찬가지잖아요. 죽어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비이성적인 선택이라고만 할 수는 없단다, 맥스. 할머니와 같은 처지에.. 2022. 5. 17.
06. 선생도 아이가 있다면 알겠지만, 그 애만 괜찮으면 난 아무런 걱정이 없어요. “개인 상담을 할 수는 있습니다.” 에릭은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사실 새 환자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맥스가 원한다면 시간을 내보지요.” “정말요?” 티크너 부인의 쌍꺼풀 없는 눈에 희망이 가득했다. “그래줄 수 있겠어요?” “네. 맥스가 원하면요.” “정말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티크너 부인이 안도하는 모습을 보자 에릭의 마음도 편해졌다. “하지만 심리 치료는 아주 만만찮은 일이고, 환자 본인이 원해야만 도움이 된다는 건 알고 계실 겁니다. 제가 맥스에게 제안은 해보겠지만 모든 건 당사자한테 달렸어요.” “그 애도 받아들일 거예요. 선생님이 내 무거운 짐을 덜어줬네요.” 티크너 부인이 휴지를 꼭 쥔 채 관절염으로 울퉁불퉁한 손을 맞잡았다. “이 세상에 그 애보다 더 소중한 건 없다오. 맥.. 2022. 5. 16.
05. 우리 손자는 내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요. “어째서 맥스에게 도움이 필요한 건지 말씀해주시죠.” “그 애는 내가 잘 먹으면 좀 더 오래 살거나 괜찮을 거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난 죽어가고 있으니까. 맥스는 그 사실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어요.” 티크너 부인은 눈도 깜빡하지 않은 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난 영양 보급관을 달고 싶지 않아요. 아흔 살이면 충분히 오래 살았지. 진통제 약효가 떨어지면 온몸이 아프다오. 난 집에서 자연스럽게 떠나고 싶어요.” “이해합니다.” 에릭은 자신도 이처럼 용감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는 더 이상의 검사는 필요 없다고 결정했다. 티크너 부인은 아무런 이상이 없었고, 본인이 치료를 거부했다. 이런 상황이면 부인의 손자에 대한 걱정을 들어주는 것이 합당했다. “맥스의 부모님은 어디 있습니까?.. 2022. 5. 14.
04. 내가 떠나면 그 애는 오롯이 혼자 남게 될 거예요. “자, 이제 부인의 상태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우울증을 앓고 계십니까? 울적하거나 기운이 없나요?” “아뇨. 아무렇지 않아요.” 티크너 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짧은 백발 머리가 새끼 흰올빼미처럼 목 위에서 흔들렸다. “정말요? 우울하다고 해도 병세를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건데요.” “괜찮다고 했잖아요.” 티크너 부인이 코웃음을 쳤다. “내 머리는 검사할 필요 없어요. 그건 그렇고, 내가 두 번째 남편과 결혼할 때 선생님은 대체 어디에 있었던 건지!” 에릭은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그럼 몇 가지만 질문드릴게요. 오늘이 며칠이죠?” “날짜가 무슨 상관이지?” “부인을 진찰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질문에 대답을 해주셔야 합니다. 미국 대통령이 누구죠?” “누구든 상관있나? 정치인들은 전부 사기꾼인데.” 에.. 2022. 5. 12.
02. 죽음을 앞둔 환자 에릭 패리시 박사는 호출을 받고 응급실로 가고 있었다. 에릭은 병원 복도를 서둘러 지나갔다. 갑자기 확성기 시스템이 켜지면서 스피커를 통해 녹음된 자장가가 흘러나왔다. 병원에서는 출산 서비스의 일환으로 아기가 태어날 때마다 자장가를 틀어주었다. 하지만 에릭은 그 소리가 위층에 있는 정신질환자들에게 고통을 줄 것을 알기에 움찔했다. 그가 담당한 환자들 중에 아이를 사산한 뒤 우울증에 걸린 젊은 엄마가 있었는데, 간간이 그 자장가 소리를 들을 때마다 감정적인 기복이 커지곤 했다. 에릭은 관리실에 자장가 소리가 정신병동까지 들리지 않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들은 항상 스피커 시스템을 바꾸는 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고만 할 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에릭이 그 비용을 내겠다고 했지만 관리실에서는 안 된.. 2022. 5. 8.
10. 레이나는 어디든 갈 거야 (마지막 회) “다음은 어떻게 하고 싶어?” 이츠카짱이 묻는다. 보스턴 커먼 ― 호텔 앞에 있는 공원 이름이었다 ― 안을 산책하고 벤치에 앉은 참이다. 눈앞의 연못 물은 탁한 녹색이고 연못가에는 개구리 동상이 자리 잡고 있다. “이츠카짱은?” 벌써 10월인데 바지 자락을 걷어 올리고 그 얕은 못에 들어가 노는 아이가 있다. 그 곁에는 엄마로 보이는 여자도 있었는데 강아지 리드 줄 같은 것을 아들의 허리에 매고 그 한쪽 끝을 손으로 감아쥐고 있었다. 아이는 장난감 양동이와 물뿌리개를 들고 있다. 레이나는 남동생인 유즈루를 떠올렸다. 연못 안의 아이는 유즈루보다 어렸지만. “난 다 좋아, 뭘 하든 안 하든.” 이츠카짱이 말한다. “왜냐면,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여행은 하고 있는 거니까.” 그건 그렇다고 레이나도 생각한다.. 2022. 2. 1.
07. 고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몸이 차가워져 있던 터라 목욕을 하기로 한 건 아주 좋은 생각이었다. 욕조 물에 몸을 담근 채 향긋한 비누로 팔다리를 씻으면서 레이나는 그리 생각했다. 욕실은 넓고 청결하고 쾌적하다. 다만 방에 혼자 있다고 생각하니 불안하기도 했다. 산책 나간 사촌 언니가 얼른 돌아와 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 배가 엄청 고프지만, 좀 있다 레스토랑에 간다(리비 일행과 약속한 가게 이름은 ‘파이브 버거스’니까 아마도 햄버거를 먹게 되겠지)는 것을 알기에 배가 고픈 것도 이제는 즐거웠다. 게다가 고래! 고래를 볼 수 있다니 ‘굉장한 일’이다. 크고, 힘세고, 귀여운 얼굴에 정직하다는 것이 레이나가 생각하는 고래다. 정직에 관해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레이나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그런.. 2022. 1. 29.
03. 순수하고 착한 아이니까, 곧 돌아올 거예요. 어째서 옆집 부부가 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에드워드와 앨리스 벌링턴 부부는 선량한 사람들이지만, 이래서야 마치 옆집 사람이 달려와야만 할 만큼 심각한 사태가 이 집에서 일어난 것 같지 않은가. “언제 온 거야?” 그 사람들을 가리키며 아내 리오나에게 일본어로 슬며시 물었더니, “아까. 경찰차 왔을 때.”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기사카 우루우는 영 마뜩잖다. 에드워드가 어깨를 두드리며 위안의 말을 건네는 것도, 앨리스가 커피를 권하는 것도. 신고를 받고 바로 와 주었지만 30분도 안 돼 돌아간 경찰 둘이 하나같이 애들처럼 어려 보였던 것도, 현재로썬 사건성이 없다는 둥 의례적인 말만 했던 것도. 사건이 되고 나선 늦으니까 신고한 것인데―. “순찰 차량에는 연락을 해 두었으니까요.” 뚱뚱한 흑인 여성 경.. 2022. 1. 25.
<스카치캔디 할머니의 비밀주머니> 어른들의 성장 판타지 소설 어른들의 성장 판타지 소설 지도에 없는 기차역, 그 곳에서 시작된 특별한 만남 2022. 1. 19.
01. 가출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국제전화가 걸려 온 시각은 오전 6시 50분. 미우라 신타로는 아직 자고 있었다. “리오나짱이야. 이츠카가 또 뭔 일을 저지른 모양이야.” 흔들어 깨우는 아내한테서 무선 전화기를 건네받았다. 신타로는 눈을 껌뻑이며 졸음을 쫓고 한쪽 손으로 머리를 긁적인다. 잠에서 깰 때면 늘 두피가 근지럽다. “여보세요.” 쉰 목소리가 나왔다. “신짱?” 여동생의 목소리는 단조로웠다. “거긴 아침이겠네. 자는데 깨워서 미안. 그런데 이츠카가 없어졌어, 레이나를 데리고.” 이해하는 데에 조금 시간이 걸렸다. “없어졌어?” 곁에 서 있던 아내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입을 삐죽 내밀어 보인다. “으응, 아마도.” 여동생의 대답이 왠지 어설프다. “거실에 편지가 놓여 있었어.” 레이나가 썼다는 그 편지를 여동생은 전화기에 대고 소.. 2022. 1. 14.
00. <집 떠난 뒤 맑음> 연재 예고 돌아가는 건 좋지만, 돌아가고 싶어지는 건 싫은 거야. 14살과 17살 소녀들은 단둘이 “미국을 보는” 여행에 나섰다. 아름다운 풍경과 사랑스러운 사람들, 그리고 「그날의 나 자신」을 만날 수 있는 일본 3대 여류 작가 에쿠니 가오리 신작 장편소설 줄거리 뉴욕에 거주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천진난만한 14살 레이나. 그녀의 사촌언니인, “예스”보다 “노”가 더 많은 까다로운 17살의 이츠카. 어느 날 둘은 단둘이 미국을 ‘보는’ 여행길에 나선다. 부모들에게 편지 한 장만 남긴 채로. 「가출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여행이 끝나면 돌아올 거예요.」 낯선 사람들과 대화하고, 히치하이킹을 하고, 남의 집에서 도그 키퍼까지……. 때로는 평온하게, 때로는 해프닝도 생기는 그들의 여행은 어린아이들답게 무모하지만.. 2022.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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