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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23

09. 다시 물 위로 떠오르기 위해, 천천히 뛰어들고 천천히 떠오르기 우리는 일단 얕은 물에서 장비를 사용하는 법과 착용하는 법 등을 배웠다. 산소통을 메는 방법과 2인 1조로 움직여야 한다는 팁도 알게 되었다. 산소통 중 하나가 망가지더라도 다른 사람의 산소통에 의지해서 나올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소통에는 다른 사람이 호흡할 수 있도록 호스를 연결할 수 있는 호스 연결점이 하나 더 나 있다. 둘이 짝을 지어 내려가야만 위험을 줄일 수 있다니. 이건 꼭 삶에 대한 비유 같았다. 우리는 의지할 사람을 꼭 붙들고 서로 기대어 살아가지 않나. 물속에 들어가서 종소리를 듣는 훈련도 받았다. 물속에서는 밖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으므로 위험을 알리거나 급히 올라와야 할 일이 생길 때는 종을 울린다. 물속에서 방향을 알려 주는 것도 종소리기에, 종소리가 곧 생명 줄이 될.. 2022. 9. 7.
08. 인간은 기대를 먹고사는 존재다. 꼬르륵. 이런 소리가 나는구나. 물속에 몸을 던지며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밖에서 사람들이 물속으로 몸을 던지는 것을 보았을 때 들었던 소리는 ‘풍덩’이었는데, 정작 물속에 들어간 사람이 듣는 소리는 자신의 숨소리뿐이다. 발을 떼기까지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들어갔는데 이퀄라이징이 안 되면 어쩌지? 내가 패닉에 빠지지는 않을까? 물속에 뭐가 있을 줄 알고? 그러나 막상 물 안에 몸을 던지자 저 육지 세상보다 더 큰 평온이 찾아왔다. 엄마의 배 속에 있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고요했다. 엄마의 배 속에 있을 때 아이들이 바깥 소리를 이렇게 듣는다는 이야 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주 작게 웅얼거리는 소리처럼 말이다. 물속에 들어가자 새 소리도, 파도 소리도, 사람들의 환호 소리도 아득했다. 그래. 내겐 이.. 2022. 9. 6.
02. 이방인으로서의 삶이, 이제 시작되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은 엄격하고 보수적이었다. ‘넌 잘난 부모님을 닮아야지.’, ‘넌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잖아.’ 처음엔 칭찬을 받는 게 좋아서, 그다음에는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그다음에는 잘하지 않으면 사랑받지 못할 것 같아서 열심히 했다. 공부도 잘하면서 부모 속 썩이지 않는 눈치 빠른 아이가 되었다. 어른의 눈을 가진 아이에게는 상처가 보인다. 부모님이 다른 사람에게 나를 자랑할수록, 나는 우쭐하면서도 짓눌렸다. 앞으로도 잘해야 하니까. 나는 그 흔하다는 사춘기도 겪지 않았다. 그렇게 자라다 보니 마음속에는 부모님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갈망이 생겼다. 대학에 가는 건 그런 내가 자유로운 세상으로 나가는 첫 발자국이었다. 그런데 집이 이렇게 된 이상, 대학에 갈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지.. 2022. 8. 24.
01. 그날은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였다. 그날은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학교에 갔고, 단짝 친구와 매점에서 보름달 빵과 초코 우유를 사 먹었고, 화학 선생님 수업은 여전히 지루했고, 대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틀에 박힌 잔소리를 들었다. 그러니까 우리 삶에서 불행한 일이 일어날 때 드라마에서 보여 주는 그런 조짐은 없었다. 까마귀가 날아가지도 않았고, 등굣길에 검은 고양이를 본 것도 아니었으며, 컵을 깨뜨리지도 않았다. 지독히 평범한 일상이 오히려 답답하게 느껴지는 하루였다. 수업이 끝나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다녀왔습니다.” 집 문을 열었을 때 어지러운 집 안에서 먼저 보인 건 곳곳에 붙은 빨간 딱지였다. 빚을 갚지 않았을 때 소유자의 재산에 대한 가압류를 표시하는 빨간 딱지. 그걸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다. 하루아침.. 2022. 8. 22.
00. <같은 파도는 다시 오지 않아> 연재 예고 오늘 치는 파도는 내가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딱 한 번의 파도니까 오늘 치는 파도는 내가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딱 한 번의 파도니까 인생의 대부분은 일을 하는 시간으로 채워진다. 우리의 시간에서 일을 떼어 내기란 어렵다. 삶에서 일을 분리할 수 없다면 중요한 건 그 시간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보내느냐이다. 일을 할 때 즐거움을 느낀다면 우리의 시간은 즐거움으로 가득 차지만, 일을 부정적인 마음으로 대한다면 많은 시간이 부정적인 감정으로 채워진다. 『같은 파도는 다시 오지 않아』의 저자 김은정은 일을 할 때 행복을 느낀다고 말한다. 『같은 파도는 다시 오지 않아』의 저자는 아버지가 출장을 갔다가 사 온 캐릭터 상품들로 가족 역할 놀이를 하던 소녀였다. 저자는 어릴 적 친구였던 캐릭터들과 함께 나이를 먹으.. 2022. 8. 19.
04. D라인의 여유 온천천을 걸었다. 사람들이 갑자기 내리는 비 때문인지 모두 종종걸음으로 바쁘게 움직였다. 나는 그들 속에 스며들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걷다 물고기가 있으면 한참 동안 멍하니 보기도 하고, 한가로이 서 있는 왜가리의 눈길을 따라 그곳에 머무르기도 하며 시간 속을 걸었다. 한참을 걷다 아름다운 광경에 미소까지 머금고 눈길을 빼앗겼다.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유모차를 밀며 걷는 젊은 엄마였다. 비가 내려도 개의치 않는 여유로운 걸음이었다. 나도 유모차와 속도를 맞추며 한참을 따라갔다. 아기 엄마가 휙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고, 놀랬죠? 너무 아름다운 모습이라 저기서부터 뒤따라왔어요.” 겸연쩍어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우산을 받쳐주며 상황을 설명했다. “에고, 비가 와서 어쩌노. 아기가 놀라겠어요.” 유모차 안을.. 2022. 7. 18.
00. <바람이 되어서라도 한 번만> 연재 예고 엄마의 몸이 한 줌의 재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 버린 지 4년, 혼자 억누르던 이야기들을 세상으로 날려 보낸다 프롤로그 새가 노래한다 편안하다. 가슴 깊이 숨겨두었던 이야기가 세상 밖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혼자 오십 년을 넘게 그것들을 꼼짝 못하게 억누르고 있었다. 스멀스멀 고개를 들기라도 하는 날이면 왈칵 쏟아지는 눈물에 풀이 꺾여 다시 숨어버린 이야기들. 이제 가볍고 아름다운 날개를 달아 밝은 세상으로 날려 보내려 한다. 언제나처럼 따라다니던 엄마의 삶 그리고 그 일부가 되어버린 내 삶. 영원히 내 곁에 있을 것 같던 엄마가 아주 먼 길을 떠나고, 이젠 가끔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려 한다. 내 어깨를 두 팔로 살포시 보듬고 조용히 속삭여준다. 수고했다고, 이제 다 지난 .. 2022. 7. 13.
09. 내 일상을 에세이로 만들려면? 서론, 본론, 결론을 갖춘 에세이 쓰는 방법 우리가 쓰는 일상의 글을 ‘에세이’라고 한다. 에세이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1. 내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 2. 주제를 논하는 산문 양식이라고 나와 있다. 즉, 어떤 글이든 관통하는 것이 에세이가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일기와 에세이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일기가 나만 보는 글이라면, 에세이는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글이라는 것이다. 먼저, 주제를 잡고 글을 써 내려가기 전에 자신의 글 쓰는 스타일을 한번 생각해 보자. 생각나는 대로 글을 써 내려가는지, 아니면 구조와 대략의 내용을 잡고 쓰는지 말이다. 글 쓰는 방식에 정답은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구조를 잡고 쓰면 글을 좀 더 수월하게 쓸 수 있고,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쓰기에는 도움.. 2022. 6. 1.
04. 나이 든 엄마_ 아이를 늦게 낳았다면 겪어야 하는 것?! 나는 비교적 늦게 아이를 낳았다. 마흔, 요즘은 그렇게 늦은 나이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동기들과 비교하면 상당히 늦었다. 게다가 아이 친구들 엄마 사이에선 내가 거의 ‘왕언니’다. 하지만 나와 남편은 그것을 오히려 더 좋아했다. 이렇게 나이 들어서 아이를 낳은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서로 관계를 구축하고 경제적으로도 안정시켜 놓고 나서 아이를 낳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그리고 여전히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더라도 늦게 아이를 가질 것이란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성숙해진 후에 아이 갖기를 원했으면서 외모적으로는 여전히 젊어 보이고 싶었나 보다. 참으로 이율배반적이지만 솔직한 심정이다. 그래서 굉장히 노력한다, 젊어 보이려고. 나이가 들면서 다들 자른다는 머리. 난 아직도 긴 머리.. 2022. 5. 7.
03. 내 그림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골방에서 혼자만 보던 그림이었다. 혼자만의 만족으로 끝나는 그림이었기에 멀찌감치 떨어져서 봐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용기를 내어 SNS에 그림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휴대전화 화면 속에서 만난 그림은 2센티미터에 불과했다. 실제 그림보다 작은 크기인 그림은 자연스럽게 멀리서 바라보는 효과를 경험하게 했다. 의도하지 않게 원근법이 적용되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발견하지 못한 어수룩함과 어색함이 보였다. 수정과 보완을 통해 완성에 가까워지려 노력했다. 원근법은 그림을 볼 때 ‘멀다’, ‘가깝다’와 같이 거리감을 느끼게 해준다. 그림과 ‘가깝다’라는 기준은 손을 뻗지 않아도 닿는 거리다. 그렇다면 ‘멀다’라는 기준은 무엇일까? ‘멀다’는 그림의 크기와 작가의 의도에 따라 달라진다. 그림의 크기가 커질수록 .. 2022. 5. 6.
01. 생각의 결 생각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갑고 기쁘다. 나이가 어리고 많음은 중요하지 않다. 나이가 많아도 아이 같은 사람이 있고, 나이가 어려도 생각이 깊은 사람도 있다. 생각의 결이 맞는 사람들에게서 안정감을 얻고, 그들의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생각을 키워나갈 수 있다. 성장한 생각은 삶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게 도와준다. 생각의 결이 비슷하다는 것은 자신에게 맞는 수채화 종이를 찾는 것과 같다. 수채화 종이는 표면의 질감이 거친 정도와 물을 머금는 시간에 따라 황목, 중목, 세목으로 나뉜다. 황목은 표면의 돌기가 가장 많다. 물을 머금은 붓으로 그리면 종이의 움푹 팬 부분에 물감이 고여 돌기들이 알갱이처럼 두드러진다. 물이 거의 없는 붓으로 그리면 돌기 부분에 물감이 채색되어 거친 질감을 .. 2022. 5. 3.
00. <깊은 밤을 건너온 너에게> 연재 예고 여백을 담는 일상의 빛깔 여백을 담는 일상의 빛깔 나는 수채화를 그리는 사람이다 《깊은 밤을 건너온 너에게》 누군가가 ‘수많은’의 기준을 물었다. 나는 모른다. 각자의 삶이 다르듯 ‘수많은’의 조건과 기준은 다르다. 연습을 통해 적당한 농도를 조절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을 것이다. 평범한 삶이 어렵듯 적당한 농도를 찾는 것 또한 쉽지 않다. 농도를 조절하는 연습을 거치다 보면 투명성을 확보하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은 그림이 나올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채화를 그리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 자신만의 ‘농도’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그 농도를 사계절로 나누어 풀어놓는다. 봄에는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은 열정과 생각이 가득하고, 여름에는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할 수.. 2022. 5. 2.
08. 나의 비밀 나무 도서관 가는 길에 ‘나의 비밀 나무’라 부르는 보물 나무가 한 그루 있다. 가든형 숯불갈비집 너른 정원에 있는 나무인데, 주인의 허락도 없이 내 나무라 정했으니 비밀인 것이다. 내 가슴께 높이의 담장 옆에 있어 정원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나무와 가까이서 눈맞춤할 수 있어 다행이다. 도서관 문턱이 닳도록 10년 넘게 다녔으니 나무 옆을 10년은 족히 스쳤을 텐데 나무를 알아본 건 최근의 일이다. 귀한 나무는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는 아니므로 귀한 나무라 해야겠다. 이 나무를 처음 만난 건 책벗들과 함께 북촌 한옥마을 골목길을 걷다가 우연히 들어선 중앙고등학교 교정에서였다. 나뭇잎도 다 떨군 11월 즈음이었을까. 특이한 열매를 매달고 있는 이 나무 아래서 정체 모를 나무에 .. 2022. 3. 23.
00. <겨우 존재하는 아름다운 것들> 연재 예고 제님 식물 에세이 책 모임에서 떠난 1박 2일 모꼬지에서 한 후배가 말했다. “나도 제님 언니처럼 한들한들 도서관 다니고 그림책 보며 여유롭게 살고 싶어.” 뜻밖이었다. ‘사람들에게 내가 그리 보였구나.’ 나는 할 말을 잃고 그저 빙그레 웃었다. 그 당시 나는 불행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었으니까. 나의 속내를 얘기하자면 1박 2일이 아니라 며칠 밤으로도 모자랄 테니까. 아이와 그림책으로 더없이 행복한 시절을 보내고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그즈음부터 나는 내내 불행하기 시작했다. 더 정확히는 생각 속에서 온통 불행했다. 육아를 핑계로 잠깐 미뤄두었던 나의 꿈은 어찌해볼 도리 없이 멀리 달아나 있었고, 동시에 엄습하듯 찾아온 공허와 불안은 얄팍한 자존감마저 추락시켰다. 하루하루 열심히 성실하게 살면 지.. 2022. 3. 14.
01. 헌책방 시바타 아저씨 헌책방 아저씨는 낡은 다다미방에서 개 한 마리와 생활했다. 아저씨는 늘 술에 취해 있었다. 작은 헌책방 안은 정리가 안 된 책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가끔 가격을 물으며 아저씨를 바라볼 때면 장사에는 통 관심이 없다는 얼굴로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지금 생각하면 책 뒤에 연필로 가격이 적혀 있었는데 나는 왜 몰랐을까. 아니면 적혀 있지 않은 책도 있었던 걸까. 니혼대학 예술학부 청강생 시험을 통과하고 6개월 만에 어학원을 졸업한 나는 대학에서 청강하고 있는 다섯 과목을 듣는 것 이외에는 아무 할 일이 없었다. 하루종일 말 한마디 안 할 정도로 고독한 시간. 이어령 선생님의 『축소지향의 일본인』 일본어판을 서점에서 산 것도 그때 즈음이었다(이 책은 시미즈 선생님이 빌려 가서 내가 귀국한 후에야 돌려주었.. 2022. 3. 8.
00. <동경인연> 연재 예고 동경인연(東京因緣)에 대하여 우리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의미를 깨닫는다. 그 시절 그곳 그 인연은 그저 추억의 한 자락으로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완성해주는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이 되기도 한다. 일본문학 번역가이자 에세이스트인 이은주는 『나는 신들의 요양보호사입니다』와 『오래 울었으니까 힘들 거야』에 이은 세 번째 에세이 『동경인연』에서 삶의 큰 강을 건널 용기를 주었던 젊은 날의 한 페이지를 열어 보인다. 그 속에는 문학이 있었고, 열정과 우정이 있었고, 배려와 사랑이, 사람들이 있었다. 이은주의 청춘의 키워드는 문학과 일본이었다.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에도 주저앉지 않고 도전정신으로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동경의 오치아이 4조반 다다미방을 거처로 삼고, 일본대학 예술학부 문예학과에서 문.. 2022. 3. 7.
05.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미카엘 중1담임 김정현쌤' 낯익은 발신자 표시를 보고 가슴이 철렁한다. 디딘 바닥이 일순간에 저 시꺼먼 아래로 꺼져 내리는 기분. 너무나 고맙지만, 결코 반갑지 않은 그가 날 찾고 있다. 살다 보면 그런 존재, 그런 관계, 그런 상황들이 있지 않던가. 불길한 예감이 실려 집어 드는 핸드폰이 무겁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의연하고 차분했다. 한 학년 내내 줄기차게 선생님을 괴롭혔던 말썽쟁이가 또 사고를 쳤다. 나는 습관처럼 죄인 된 심정으로 머리를 조아리며 용건을 전해 듣는다. 이번 사건은 같은 반 친구랑 벌인 주먹다짐이다. 서로 조금씩 다쳤으나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사려 깊은 선생님은 학부모 안심시키기를 빠뜨리지 않는다. 둘을 데리고 막 병원으로 출발하려는 참인데 올 수 있겠느냐고 묻는.. 2022. 2. 19.
02. 너와 나의 평행이론 할머니와 나 어렸을 때 나는 할머니와 같이 방을 썼다. 젊어서 혼자가 된 할머니는 서울의 큰아들 집과 순천의 작은아들 집을 육 개월에서 일 년씩, 여행하듯 번갈아 다니시며 노후를 보냈다. 희고 고운 얼굴을 가진 할머니와 나를 보면서 사람들은 둘이 많이 닮았다고 했다. 그땐 그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무슨 말인지 알아갔다. 거울 속 어딘가에는 돌아가신 그의 얼굴이 어렴풋이 함께 있다. 할머니는 기다란 곰방대에 봉초 담배를 다져 넣어 피웠는데, 담배 찌꺼기와 냄새에 불평하는 어린 손자와 티격태격도 꽤 했다. 손자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면 가끔 곰방대를 들어 “이 망할 놈!” 하셨지만 진짜로 때린 적은 없다. 할머니는 한쪽 다리가 불편했다. 지팡이는 외출의 필수품이었고, 막둥이인 내가 그.. 2022. 2. 16.
01. 미국아빠 판타지 미국 영화에서 종종 발견되는 클리셰 하나. 아빠와 캐치볼 또는 플라이낚시를 하던 아이가 얼굴을 바로 쪼는 햇볕에 눈을 찡그리며 질문을 던진다. 배경이 미국이고 영화의 한 장면인 만큼 “나 오늘 학원 안 가면 안 돼요?” 같은 질문이 아니다.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여기가 바로 작가나 연출자가 힘주고 있는 대목임을 감지한다. 영화의 도입부 어딘가에는 관객에게 의미심장한 동기나 암시를 주려고 고심한 흔적이 꼭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건넨 질문은 아마도 그 물음 자체로도 다양한 상상을 유발할 수 있고, 적당히 추상적이면서 복합적일 확률이 높다. 미국 아빠들은 이때를 허투루 낭비하지 않는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는 듯 나긋한 목소리, 온화한 눈빛으로 필요한 대답을 들려준다. 절묘한 은유와 심오한 함축의 언.. 2022. 2. 15.
00. <아빠의 비밀일기> 연재 예고 싱글대디 좌충우돌 성장에세이 ‘이 미숙한 것들한테 어떻게 세상을 맡기나?’ 걱정이 태산 같을지 모르나 천만의 말씀이다. 자고이래 세상은 늘 젊은이들의 것이었다. 깔고 앉은 자리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새로운 임자에게 제때 비켜주지 못하는 자를 일컬어 세상은 꼰대라고 부른다. 변화의 흐름에 올라타지 못하면 자기만 외롭고 힘들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붙잡고 늦추고자 한다면 끊임없이 학습하고 적응하는 방법밖에 없다. 내게 미래란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다. 꿈꾸는 내일임과 동시에 받아들이고 적응해야 하는 숙제이기도 하다. - 본문 「꼰대의 시간은 흐른다」 중에서 ‘아이라는 선물’을 받은 젊은 아빠의 한없이 신기하고 벅찬 감정으로 책은 시작된다. 그러다 어느새 사춘기 아이들의 질풍노도에 하릴없이 나부끼는 고단한 중년.. 2022. 2. 14.
10. 다시, 제주살이의 시작 (마지막 회) 아침 9시. 제주행 배편이 있는 완도의 하늘은 맑았고, 바람은 잔잔했다. 숙소를 나와 두 달 치의 짐이 가득 실린 차를 몰아 완도항으로 갔다. 평온한 바다 위로 우리가 타고 갈 여객선의 모습이 보였다. 안내자의 수신호에 따라 차량을 선적하는 배 밑 후미로 이동했다. 배 안쪽엔 이미 우리와 함께 제주로 갈 차량이 줄지어 있었다. 이제 채워지고 있는 줄을 따라 뒤쪽에 차를 세웠다. 차량을 통제하던 사람들은 능숙하게 차바퀴에 줄을 묶어 배 바닥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이제 배 타고 조금만 가면 제주야.” 6년 만의 제주였고, 결혼 이후 처음 가는 제주였다. 집을 나와 첫 독립생활을 하고, 아내를 만나고, 곳곳을 다니며 연애를 하고, 평생 함께할 결심을 했던 곳. 아내와 술이라도 한잔할 때, 어느 정도 취기가 .. 2022. 2. 4.
00. <이번에는 붙을 수 있을까> 연재 예고 “우리는 모두 각자만의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시험을 준비하고 있을 당신에게 건네는 자그마한 위로 ‘선생님’은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오는 직업 중 하나다. 우리가 가족이 아닌 누군가와 처음 관계를 맺을 때 그곳엔 대부분 ‘선생님’이 있었다. 우리는 선생님의 지도하에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크고 작은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기도 하고 뚜렷하기도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이유다.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우리에게 친숙하면서도 개개인의 삶에 많은 영향을 주는 만큼, 선생님을 꿈꾸는 사람들도 그만큼 많다. 아이들을 좋아하거나, 학생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고 싶은 등 그 이유는 다양하지만, 꿈꾸는 사람이 많다는 건 한편으론 경쟁이 치열하다는 의미이기.. 2022. 1. 17.
00. <결혼은 안 해도 아이는 갖고 싶어> 연재 예고 정자은행과 생식의료에 관한 이야기 여성의 경제활동이 많아지고, 사회가 복잡다단해지면서 결혼의 적령기가 늦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비혼'이 하나의 트렌드로 떠오르며 결혼은 부담스럽지만 아이는 하나쯤 낳아 기르고 싶다고 생각하는 여성이 늘고 있다. “아이를 낳아서 양육하는 건 해보고 싶었는데, 결혼 제도에 묶이는 건 싫다. 우리나라에서 결혼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가족과 가족 간의 결합이라는 인식이 강하고, 실제로도 그렇다 보니 결혼제도 외에 자발적 비혼모가 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라는 것이 비혼모를 생각하는 여성들의 생각이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방송인 사유리 씨가 외국에서 정자 기증을 받아 고향 일본에서 아기를 출산했다고 알려지면서 비혼 여성의 선택적 임신과 출산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졌다. 하지.. 2022.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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