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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22

07. 이제는 만날 수 없는 할매에게 할매는 굳센 바위 같은 사람이었다. 모진 세월의 비바람을 맞고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제자리에 서 있는 바위. 열아홉 살 전쟁미망인은 자신 앞에 놓인 운명을 받아들이고 어린 아들과 살아남기 위해 가장 단단한 바위가 되었다. 세상사 웬만한 일에 눈도 깜짝 안 하셨고 싸늘한 눈가에는 눈물이 말라 흐르지 않았다. 어느 날 그 바위틈에서 여린 풀이 자라났다. 차갑게 메말랐던 바위는 그 풀잎을 금지옥엽처럼 여기고 사랑했다. 나는 할매의 첫 손녀였고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성장했다. 우리는 25년을 한집에서 살았다. 25년째 되던 해 어느 여름날이었다. 영맘 할매! 할매! 엄마, 할매는? 엄마 할매 2층에 계신다. 요즘 자꾸 2층 소파에 누워만 계시네. 할매가 어느 날부터 2층 소파에 누워만 계셨다. 아픈 데는 없는데.. 2022. 11. 17.
10. 시즌3_엄마의 꽃밭, VR 버츄얼 휴먼에 이어서 이제는 풍경이다! (마지막 회) 2021년 여름. 제작진은 세 번째 이야기를 준비하면서 하나 씨와 엄마가 어디에서 어떻게 만나야 가족 모두에게 행복한 기억으로 남을지를 고민했다. 시집와서 40년을, 이사 한 번 하지 않고 내내 살았던 인천의 이층집. 그중에서도 엄마가 좋아하던 곳은 마당의 꽃밭이었다. 봄이면 장미와 샐비어가 만발하던 꽃밭. 매년 5월이면, 하나 씨 가족은 엄마가 정성스레 가꾸던 꽃밭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엄마가 떠나시자 돌보는 사람 없는 꽃밭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곳에서 사진을 찍을 일도 없었고, 가족들은 서로 서먹서먹해지기 시작했다. 모두를 돌봐주던 엄마로 인해 가족이 함께할 수 있었음을 이제야 알았다. 제작진은 VR 공간에 엄마의 꽃밭을 만들고, 그곳에서 엄마와의 소소하지만 소중했던 일상을 체험.. 2022. 11. 15.
08. 버츄얼 휴먼으로 스킨십을 흉내 낼 수 있을까? 아이들도 기억하는 부부의 사랑을 뽀뽀와 같은 스킨십으로 흉내 내 볼 수 있을까? 그것도 그리움을 표현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러나 현실적으로 촉감 구현이 가장 어렵다. 가상체험에서 몰입감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큰 요소가 ‘대상과의 상호 작용’이다. 몸짓, 눈맞춤, 무언가를 건네거나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현실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이번에는 어떤 상호 작용을 통해서 아내를 그리워하는 체험자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을까? 아내를 안아보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든 비슷하게라도 구현하고 싶었다. 우리는 손과 눈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장갑과 HMD에 대상(버츄얼 휴먼)이 따라가고 반응할 수 있는 주요 트래커가 부착해 있고, 체험자의 움직임을 반영할 수 있었다. 부부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이 무기를 어떤.. 2022. 11. 13.
05. 나연이 버츄얼 휴먼에 도전, 모션캡처가 뭐에요? 나연이의 버츄얼 휴먼이 완성되고 있었다. 이제 모션 캡처를 할 차례다. 모션 캡처용 수트를 입은 배우의 동작을 따서 그 데이터로 캐릭터를 움직여야 한다. 이렇게 녹화된 동작 그대로 엄마와 만남이 이루어진다. 동작을 맡은 배우는 아이의 사진과 동영상을 연구하며 의욕적으로 참여해 주었다. 모션 캡처 전에 아이를 오랫동안 돌봐주셨던 유치원 선생님을 섭외해 아이의 동작을 세심히 물어보기도 했다. 아이가 어떻게 걷는지, 어떻게 뒤돌아보는지, 어떻게 웃는지 등을 배우가 시연하면 선생님이 수정하는 방식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닮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이다. 나연이의 유치원 선생님은 성심껏 모든 동작을 기억해 우리에게 도움을 주었다. 인터뷰는 한사코 사양했다. 속으로 내내 울고 계셨던 것 같다. 나연이가 달려와 안.. 2022. 11. 10.
03. 시즌1_나연이네 가족, 낯선 VR와의 첫만남 사실 이 일을 하면 누군가를 잃은 사람을 너무 많이 만난다. 그래서 이런저런 사연에 둔감해지고,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아이템이 될까 안 될까를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에 놀라게 된다. 그런데 그날은 그냥 들었다. 너무 맑은 날에, 나연엄마가 눈물을 흘리면서 인생이 실패로 느껴진다고 했다. 아이를 잃으면 엄마는 그냥 슬프기만 한 게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자기 자신을 손가락질하는 인간이 된다. 이상하게 화가 났다. 나라면 어떨까. 아이를 지키지 못했을 때, 나라면 누구를 손가락질할까. 나와 비슷한 연배인 나연엄마는 90년대 개그감을 갖고 있어서 대화하며 자주 웃었다. 그런데 왜 나연엄마는 아이를 잃고 3년 동안, 그렇게 아픈 기억을 기록하고 있었을까. 나연엄마는 농담처럼, 이제 갱년기가 오는.. 2022. 11. 8.
01. 삶이란 너랑 했던 일들의 기억 VR 기술을 어떻게 결합할 생각을 했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때마다 다른 대답을 한 것 같은데,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어떤 공간 안에서 헤어진 가족을 다시 만난다면’이라는 기획안을 쓰긴 했다. 자신은 별로 없었다. 기획을 꺼내면 접어야 할 이유가 할 이유보다 많은 법이다. 가장 구체적인 부정적 반응은 “HMD를 쓰고 있으면 표정이 안 보이는데 감정이 전달되겠냐”라는 반응이었다. 맞는 말이라 뭐라 하기도 어려웠다. 이런 말들을 들으면 “아무래도 그렇지” 하고 접을 생각부터 하게 된다. 그로부터 1년 후, 코로나가 막 유행하던 2020년 1월에 의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홍보 자료에 VR과 휴먼 스토리의 결합이라고 해서인지 많은 기자가 와주었다. 프로그램을 소개하는데 긴장해서 적어온 말들을.. 2022. 11. 6.
00. <너를 만났다> 연재 예고 MBC 창사 60주년 VR 휴먼 다큐멘터리 대기획 ***** 2020년 ABU 다큐멘터리 부문 대상! ***** 2021년 프리 이탈리아 스페셜 멘션상! ***** 유튜브 3천만 뷰 VR 휴먼 다큐멘터리 화제의 방송!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기술의 힘을 빌려 하늘나라에 있는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기술의 힘을 빌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어떤 수식어도 없는 이 문장이 〈너를 만났다〉의 카피였다. 처음 시도하는 프로그램이었고, 2020년 2월 인간적인 시선과 과학기술의 완벽한 조합으로 이뤄낸 MBC 〈너를 만났다〉시리즈 1,2,3을 한 권에 담아 책으로 만나게 되었다. 딸을 잃은 나연엄마의 이야기로 엄마의 사랑 이야기를, 아내를 잃은 정수 씨의 이야기로 남녀의 .. 2022. 11. 5.
00. <바람이 되어서라도 한 번만> 연재 예고 엄마의 몸이 한 줌의 재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 버린 지 4년, 혼자 억누르던 이야기들을 세상으로 날려 보낸다 프롤로그 새가 노래한다 편안하다. 가슴 깊이 숨겨두었던 이야기가 세상 밖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혼자 오십 년을 넘게 그것들을 꼼짝 못하게 억누르고 있었다. 스멀스멀 고개를 들기라도 하는 날이면 왈칵 쏟아지는 눈물에 풀이 꺾여 다시 숨어버린 이야기들. 이제 가볍고 아름다운 날개를 달아 밝은 세상으로 날려 보내려 한다. 언제나처럼 따라다니던 엄마의 삶 그리고 그 일부가 되어버린 내 삶. 영원히 내 곁에 있을 것 같던 엄마가 아주 먼 길을 떠나고, 이젠 가끔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려 한다. 내 어깨를 두 팔로 살포시 보듬고 조용히 속삭여준다. 수고했다고, 이제 다 지난 .. 2022. 7. 13.
08. 근원 : 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자리 성공은 행복의 열쇠가 아닙니다. 행복이 성공의 열쇠입니다.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한다면, 당신은 성공한 것입니다. - 알베르트 슈바이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2022년 임인년 범띠이신 당신의 해를 맞지 못하고 작년 연말 동지에 돌아가셨다. 슬픈 것은, 2년 동안 요양원에 계시다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집에서 뵌 모습이 오래되어 실감이 나지 않더라는 거다. 이제 더 이상 집에 안 계신 것이 잠시 부재중이신 건지 아주 안 계신 건지. 내가 조금만 더 현명했으면 임종을 지켰으리라. 열이 높고 혈압은 낮고 호흡이 가쁘다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호흡이다. 목‘숨’이다. 그때 어떡하든 자리를 지켰어야 했다. 천추의 한이 되는 마음을 겨우 가라앉힌다. 다달이 붓고 있던 상조회사의 도움을 빌어 급하게 빈소를 차렸.. 2022. 7. 8.
01. 순간 : 행복을 이루는 최소의 시간 단위 섣달 그믐날이었다. 내일이면 진짜 새해가 시작되는 설이다. 아르바이트 면접 간 둘째가 어디쯤일까 싶어 3시쯤 전화를 걸었을 때 인사동이라고 했다. “우리도 나갈까?” 여기서 우리란, 아들을 뺀 나와 막내를 지칭한다. 귀한 명절 연휴가 아닌가. 음식은 다 해놓았겠다, 큰 일거리가 없었다. 아직 해가 있을 때 나가고 싶었다. 가는 해의 마지막 해인 셈이다. 엄마와 언니의 전화 내용을 듣던 막내가 방에서 튀어나오며 “우리 외식해?” 하더니 “우와앙, 신난다. 꽃단장해야지.” 하며 제일 신나 한다. 밖으로 나왔다. 어머, 오늘 날씨 왜 이래? 음력 설 전날이 진정 맞는 것인지? 거짓말 조금 보태어 봄날이었다. 3일 전 아들이 입대한 나의 쓸쓸한 마음을 단박에 녹여주는 훈풍이 불고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불변의.. 2022. 6. 29.
02. 위로 진이만 보면 남편이 물어본다. “공부도 못하는데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 거야?”로 시작해서 “네가 정말 한심하다. 공부를 해보기나 했냐?”는 말로 끝난다. 오늘도 2시간을 실컷 닦달당하고 힘이 없어 보였다. 몇 시간 후. 핸드폰을 들고 게임을 하는 아이에게 말했다. 엄마 : 진아, 네가 힘들고 외로울 때 엄마가 항상 옆에 있을 거야. 진 : 항상? 엄마 : 응. 진 : 옆에만 있으면 뭐 해? 엄마 : 엄마가 너 대신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왜냐하면, 결국은 네가 헤쳐나갈 길이니까. 진 : ……. 엄마 : 계속 옆에 있어 줄게. 진 : (핸드폰만 보는) ……. 엄마 : 응? 진 : 알았어. 아이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게임을 한다. 나도 빨래를 마저 갠다. 우리 사이에 침묵이 있지만 우린 안.. 2022. 5. 27.
00. <스파이더맨의 비애> 연재 예고 남다르게 평범한 여성의 가족과 책과 인생 책을 여는 말 아이들을 키우면서 마주이야기를 썼다. 어디 풀 곳도 없고 키우는 일은 만만치 않아서 엄마인 나를 늘 좌절하게 했다. 육아는 오롯이 혼자만의 몫이었고, 모순투성이 엄마는 항상 흔들리고 약해지고 답답했다. 그렇지만 아이들의 행복과 기쁨에 1순위를 두었던 것은 지금까지 했던 일 중 가장 잘한 일이다. 이제 20대를 살고 있는 아이들은 최소한 ‘자기 행복에 대해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 덕분에 엄마인 나는 조금 마음을 놓아 본다. 자기 행복을 아는 사람이 남의 행복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그러면 따뜻한 사회 일원이 되리라 생각한다. 요즈음은 ‘혼자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혼자 하는 말도 점점 늘겠지, 생각한다. 나이가 들수록 혼자 잘 노는.. 2022. 5. 25.
08. 가족 VS 물질적 행복 얼마 전에 남편이, ‘당신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를 물어보는 미국 한 리서치에서 다른 나라들은 모두 ‘가족’을 1순위로 선택했는데, 한국만이 유일하게 ‘물질적 행복’을 가장 중요하게 선택했다고 이야기했다. “에이 설마…. 어떻게 그럴 수가?” 그래서 자료를 찾아보았는데 놀랍게도 사실이었다. 미국 Pew 리서치 조사1 중 미국, 영국, 프랑스 그리고 일본까지. 모든 나라는 ‘가족’이 가장 중요했는데 우리나라만 유일하게 ‘물질적 행복’이 1위였다. 그래서 이에 대해서 내가 아는 지인들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중 결혼한 지 아직 10년이 채 안 된 지인이 말했다. “나도 지금은 물질적 행복이 중요해. 솔직히 처음에는 사랑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다른 것 다 안 보고 사람.. 2022. 5. 12.
00. <결혼부터 아이까지> 연재 예고 결혼, 임신, 출산, 육아 그 풀리지 않은 숙제에 관하여! 2018년에 『나는 난임이다』를 출간하였고 2021년 초에 개정판을 내었다. 개정판을 내면서 초판에 말하지 못했던 내용을 더 추가하였지만, 여전히 ‘결혼, 임신, 출산, 육아’라는 큰 그림에 대한 풀리지 않은 숙제 같은 것이 항상 머릿속에 응어리져있었다. 난임에 집중하는 동안에는 일단 아이만 성공적으로 갖게 되면 이를 에워싼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잠시 빠졌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근본적으로 우리는 왜 반려자와 가족을 시작하려 하는지, 반려자와 어떻게 조화를 이뤄야 하는지, 우리는 왜 아이를 가지려고 하는지, 아이를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이를 갖게 된다면 어떻게 조화롭게 살 수 있을지, 그리고 아이.. 2022. 5. 2.
04. 최고 중의 최고, 축구 선수 '호날두'의 반전있는 과거 나는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가난이 너무 싫었지만 도망치고 또 도망쳐도 도망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이었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면 나는 너무나 무서웠다. 형은 마약 중독자였고 약에 취해서 꿈꾸며 현실에서 도망쳐버렸다. 우리 가족의 유일한 생명줄은 청소부 일을 하는 어머니였다. 그렇지만 그 무렵 나는 청소부인 어머니가 너무 부끄러웠다. 나는 빈민가 놀이터에서 혼자 흙장난을 하면서 동네 친구들이 축구하는 것을 구경하곤 했다. 그들은 내가 가난한 그들보다 더 가난하다는 이유로 나를 축구팀에 넣어주지 않았지만 괜찮았다. 내 쪽으로 우연히 날아온 축구공을 찼을 때 나는 처음으로 희열이란 것을 느꼈다. “어머니, 저도 축구가 하고 싶어요. 저를 축구팀에 넣어주실 수 있나요?” 철없는 아들의 부탁에 어머니는.. 2022. 4. 26.
08. 아름다운 인연을 이어준 영업 편지 중년의 가슴에 불어오는 봄바람 긴 가뭄으로 인해 메말랐던 산야를 흠뻑 적셔준 단비 덕분에 풀도 나무도 모든 생물이 바쁜 움직임을 보인다. 싱싱한 새싹과 예쁜 꽃들의 향연이 그려지는 고개 넘은 3월이다. 영업소 연인들을 찾아가며 일을 한 지 3개월 차가 되었다. 정해진 요일에 정해진 영업소를 계속 다니다 보니 “우리 영업소는 화요일마다 오시는 거죠?” 하며 방문하는 요일을 기억해 주시는 연인도 있다. 한가한 시간에 방문한 영업소에서 당직하던 초, 중년 연인이 “봄이 오고 곧 새싹이 나올 텐데 사라지는 감성이 너무 아쉽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내 연인의 절반 이상이 중년이고 나도 중년이다. 자칫하면 잠들 수 있지만 그러지 않기 위해 쎄시봉(프랑스어로 ‘아주 멋지다’라는 뜻이다) 가수를 찾거나 악기를 배우거.. 2022. 3. 24.
05.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미카엘 중1담임 김정현쌤' 낯익은 발신자 표시를 보고 가슴이 철렁한다. 디딘 바닥이 일순간에 저 시꺼먼 아래로 꺼져 내리는 기분. 너무나 고맙지만, 결코 반갑지 않은 그가 날 찾고 있다. 살다 보면 그런 존재, 그런 관계, 그런 상황들이 있지 않던가. 불길한 예감이 실려 집어 드는 핸드폰이 무겁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의연하고 차분했다. 한 학년 내내 줄기차게 선생님을 괴롭혔던 말썽쟁이가 또 사고를 쳤다. 나는 습관처럼 죄인 된 심정으로 머리를 조아리며 용건을 전해 듣는다. 이번 사건은 같은 반 친구랑 벌인 주먹다짐이다. 서로 조금씩 다쳤으나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사려 깊은 선생님은 학부모 안심시키기를 빠뜨리지 않는다. 둘을 데리고 막 병원으로 출발하려는 참인데 올 수 있겠느냐고 묻는.. 2022. 2. 19.
04. 보이후드 영화 는 로 익숙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작품이다. 2015년 1월 신촌의 작은 극장을 홀로 찾아 처음 이 영화를 보았다. 오전 첫 회차인 조조 상영이라 관객은 두엇뿐이었다. 바깥이나 극장 안이나, 날씨도 분위기도 을씨년스럽기가 하나같았다. 그러나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세상은 두 시간 전에 비해 훨씬 푸근했다. 마음 한편에 보드랍고 말랑한 감정들이 몽글몽글 덩이지는 걸 느꼈다. 독특하고 새로웠다. 새해 벽두였지만 조급하게도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올해 최고의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먼 훗날 인생영화를 꼽더라도 가뿐하게 베스트10 안에 들지 않을까! 한두 달 동안은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게 이 영화를 꼭 봐야 한다며 영업을 하고 다녔다. 는 평단으로부터 받아 낸 융단 호평으로도 유명하다. 한 영화평론가.. 2022. 2. 18.
03. 순수의 기원 열다섯 살, 말 안 들어 먹는 건 국가대표급이고 갈수록 제멋대로이기만 한 사춘기 소녀 로사. 그런 로사를 아직도 아빠는 가끔 “아가야!”라 부른다. 언젠가 혹자 하나는 그걸 듣고는 지청구를 놓았다. “아니, 얘가 어떻게 아직도 아가야?” 모르는 소리 하고 있다. 경솔하게 입 밖에 내서 좋을 게 없는, 그야말로 모르는 소리다. 딸이 없어 불행한 자가 요량 없이 뇌까린 말에 대꾸는 해서 무엇 하나. 대체 나이가 무슨 소용? 아빠에게 딸내미의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영원한 아가가 있다는 기쁨을 어찌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있을까! 가족 내부에서도 민원이 접수된 적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미카엘 군의 의견이었다. “로사가 지금 몇 살인데 아직도 아가라고 불러요?” 여동생이 여전히 아가인들 오빠로서 별 손해 볼 .. 2022. 2. 17.
01. 미국아빠 판타지 미국 영화에서 종종 발견되는 클리셰 하나. 아빠와 캐치볼 또는 플라이낚시를 하던 아이가 얼굴을 바로 쪼는 햇볕에 눈을 찡그리며 질문을 던진다. 배경이 미국이고 영화의 한 장면인 만큼 “나 오늘 학원 안 가면 안 돼요?” 같은 질문이 아니다.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여기가 바로 작가나 연출자가 힘주고 있는 대목임을 감지한다. 영화의 도입부 어딘가에는 관객에게 의미심장한 동기나 암시를 주려고 고심한 흔적이 꼭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건넨 질문은 아마도 그 물음 자체로도 다양한 상상을 유발할 수 있고, 적당히 추상적이면서 복합적일 확률이 높다. 미국 아빠들은 이때를 허투루 낭비하지 않는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는 듯 나긋한 목소리, 온화한 눈빛으로 필요한 대답을 들려준다. 절묘한 은유와 심오한 함축의 언.. 2022. 2. 15.
00. <아빠의 비밀일기> 연재 예고 싱글대디 좌충우돌 성장에세이 ‘이 미숙한 것들한테 어떻게 세상을 맡기나?’ 걱정이 태산 같을지 모르나 천만의 말씀이다. 자고이래 세상은 늘 젊은이들의 것이었다. 깔고 앉은 자리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새로운 임자에게 제때 비켜주지 못하는 자를 일컬어 세상은 꼰대라고 부른다. 변화의 흐름에 올라타지 못하면 자기만 외롭고 힘들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붙잡고 늦추고자 한다면 끊임없이 학습하고 적응하는 방법밖에 없다. 내게 미래란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다. 꿈꾸는 내일임과 동시에 받아들이고 적응해야 하는 숙제이기도 하다. - 본문 「꼰대의 시간은 흐른다」 중에서 ‘아이라는 선물’을 받은 젊은 아빠의 한없이 신기하고 벅찬 감정으로 책은 시작된다. 그러다 어느새 사춘기 아이들의 질풍노도에 하릴없이 나부끼는 고단한 중년.. 2022. 2. 14.
02. 다시 강아지를 키우기로 했습니다. 모카와의 첫 만남 : 강아지가 좀 커요 드디어 무명의 여아 5, 모카를 만났다. 연한 갈색 털을 지닌 모카는 주먹치고는 많이 컸다. 굳이 주먹이라면 거인의 주먹이랄까. ‘크다고 미리 말씀하신 게 빈말은 아니었구나.’ 자세히 보니 주먹 크기에 비할 것도 아니고 통 식빵 두 개를 붙여놓은 정도로 컸다. 이미 입양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강아지의 크기나 몸무게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큼직한 몸집을 보니 당황스럽긴 했다. 또 현실적인 이유로 당황했는데, 우리가 사 가지고 간 켄넬이 강아지의 몸집에 비해 썩 넓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 사 두면 다 성장하기 전까지 6개월쯤 쓰겠다 싶어 펫숍에서 가장 큰 것으로 샀는데 실제로 넣어 보니 강아지가 일어서면 머리를 곧게 펴지 못할 정도였다. 슬픈 예감은.. 2022.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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