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일본소설32

09. 이미 충분히 살았습니다. 이미 충분히 살았습니다. 유서 속의 그 한 문장이 도우코의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게다가 그 글씨─. 유서는 블루블랙 만년필로 쓰여 있었다. 도우코가 어릴 적부터 받아 온 많은 편지도 그러했다. 굵직굵직하면서도 특유의 둥그스름한 느낌이 나는 부드러운 그 글씨. 두 번 확인할 것도 없이 도우코가 아는 치사코 씨 그 자체여서 치사코의 인품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데다 거의 체온과 육성까지 동반하여 도우코를 동요하게 만들었다. 고인과 마지막으로 만난 때가 언제이며 전화 통화 외에 마지막으로 이야기 나눈 게 언제인지, 어떤 내용의 이야기였는지, 최근 들어 달라진 점은 없었는지, 고인과는 친했는지, 다른 두 사람에 대해 뭔가 들은 이야기가 있는지─. 이런 경우, 경찰에는 질문의 수순이란 것이 있을 테니 어쩔 수 없.. 2022. 9. 30.
08. 이런 사건을 일으키지 않더라도 남은 생이 그리 길지는 않았을 터이다. 시노다 도요로서는 믿기 어렵게도 아버지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아키타 집은 팔아 버리고, 장서는 대부분 도서관에 기증하고(나머지는 유학 중인 손녀에게 물려준다고 유서에 쓰여 있고, 그 책들은 배편으로 이미 발송을 마쳤다), 가재도구 외 개인 물품도 전부 처분되고(평소 그릇에 꽂혀 있었고, 구식 카메라를 즐겨 수집하기도 하고 상당수의 음반도 갖고 있었을 터인데 그것들을 아버지가 어디서 어떻게 처분했는지 도요로서는 짐작도 가지 않는다), 통장이며 보험 증서, 연금 수첩, 집 매매 계약서와 같은 중요 서류는 물론이고 배편으로 손녀에게 보낸 짐의 부본에 이르기까지 꼼꼼하게 정리해 가방에 넣어 두었다. 확실히 충동적인 자살은 아니고, 그만한 준비를 가족에게 일절 알리지 않고 전부 혼자서 진행해 왔다는 사.. 2022. 9. 29.
07. 대체 왜, 엄마의 엄마라는 사람은 하필이면 섣달 그믐날 자살 따위를 했을까. 100엔 숍에서 산 보풀 제거기는 성능이 꽤 우수해서 본체가 작은 것을 감안하면 의외일 만큼 큰 모터 소리와 함께 적확하게 보풀을 빨아들인다. 스웨터 두 장과 코트 한 벌의 보풀을 제거한 후, 나는 아내에게 보풀이 생긴 옷가지가 없냐고 물었다. 가능하면 코트처럼 큰 게 좋겠다고 덧붙인 까닭은 단순 작업에 몰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설명서에 따르면 털이 짧은 카펫의 보풀도 제거할 수 있는 모양인데 우리 집에 카펫 같은 건(털이 길든 짧든) 한 장도 깔려 있지 않다. “갔으면 좋았을걸.” 내 질문을 무시하고 아내는 말했다. “가지 않고서 심란하고, 그래서 보풀 따위 제거하고 있을 바엔 차라리 갔으면 좋았을걸.” 라고. 이번엔 내가 그 말을 무시한다. 남향의 거실은 밝은 데다 기름 난로 덕에 따뜻하다. 어젯밤.. 2022. 9. 28.
06.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뼛속 깊이 스며드는 맛과 차가움. 낮에 경찰서에는 쥰이치 외에 시노다 간지의 유족과 미야시타 치사코의 유족이 와 있었다(사정 정취는 따로따로 받았지만, 첫 설명은 한방에 모여 다 같이 들었다). 유족도 아닌 쥰이치가 불려 간 까닭은 그렇게 하도록 유서와 함께 쥰이치의 연락처가 남겨져 있었기 때문이며 경찰의 설명에 따르면 츠토무에게는 일가친척이 없는 듯하다. 확실히 줄곧 독신을 유지해 왔고 외동이라서 형제자매도 없고 양친은 이미 타계했다. 하지만 단 한 명의 친척도 없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지 쥰이치는 알 수 없었다. 사촌이든 육촌이든, 그 자녀든 손주든 누군가는 있지 않을까. 아니면 츠토무 자신의 숨겨 둔 자식이라든지? 쥰이치가 아는 것만 해도 츠토무에게는 여자가 몇 명인가 있었다. 여자뿐만이 아니다. 츠토무에게는 친구도 아주 많았.. 2022. 9. 27.
04. 치사코 씨가 떠나 버렸다. 도우코가 알게 된 것은 그게 다였다. 점심상은 호화로웠다. 떡국과 설음식 외에 고기 요리 두 종류와 샐러드 두 종류가 올라오고, 동글동글한 방울 초밥까지 나왔다(“많이 만들어 놨으니까 괜찮으면 나중에 싸 갖고 가게나.”). 별로 잘하지 못하는 술을 마시면서 나는 묵묵히 음식을 먹었다. “그러고 보니, 누님 또 책 나왔던데.” 장모가 불쑥 말했다. “그렇습니까?” 누나하곤 십 년 넘게 얼굴을 못 봤고 그럭저럭 이름이 알려진 작가인 듯한 누나의 저서도 나는 읽어 본 적이 없다. “신문에 광고가 났더라고. 얼굴 사진까지 넣어서.” “네에.” 나는 짧게 대답했다. 식사를 마치고 장인이 TV를 켜자 갑자기 끔찍한 뉴스 속보가 자막으로 흘러나왔다. 도내 호텔에서 노인 셋이 엽총으로 자살했다는 내용이었다. “뭐야. 무서워.” 리호가 말했다. 자막은 짧고.. 2022. 9. 25.
03. 이미 우리 가족은 와해되고 말았다. 아내가 검정 레이스 속옷(이란 요컨대 브래지어와 쇼츠)만 걸친 모습으로 커다란 코끼리를 타고 앉아 뒤에 많은 늑대를 거느린 채 거리를 행진하면서 길가의 나를 내려다보며 우아하게 미소 짓는다. 그와 같은 기묘한 꿈을 꾸고 눈을 뜨자 곁에 아내의 모습은 없고 시트와 베개만 놓여 있었다. 창밖은 이미 해가 떠올라 밝다. 아내는 거실에 있었다. 제대로 옷을 갈아입고서(나로 말할 것 같으면 파자마에 플리스를 걸쳤을 뿐이다)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잘 잤어? 새해 복 많이 받아.” 지난밤, 날짜가 바뀐 순간에 TV(새해맞이 카운트다운은 TV도쿄를 보며 맞이하는 것으로 정해 놓았다. 화려한 악기 소리가 좋다)를 보면서 건배하고 새해 인사도 입에 올렸지만 더욱 확실히 다지기 위해 다시 한번 말했다. “맥주.. 2022. 9. 23.
02. 가 본 적이 없으니, 그리워한다는 게 이상하지만. 세 사람은 1950년대 말에 처음 만났다. 미술 관련 서적을 다루는 작은 출판사에 먼저 간지가, 몇 년 늦게 치사코와 츠토무가 입사했던 것. 출판업계 전체가 잘나가던 시절이어서 날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즐겁기도 했다. 세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동료도 있었지만 여러 해가 지나는 동안 한 사람씩 빠져나갔다)은 죽이 잘 맞아서 공부 모임이라 칭하며 연극이니 영화니 콘서트를 보러 다니기도 하고, 술잔을 기울이며 뜨겁게 예술론을 벌이기도 했다. 세 사람 사이는 츠토무가 이직해도 간지가 이직해도 변함이 없었다. 마침내 회사가 망한 후에도 공부 모임(이라는 이름의 모임)은 남았다. 각자의 인생이 있다 보니 만나는 빈도가 떨어지는 시기도 있었지만 끊긴 적은 없고, 10년 전에 느닷없이 간지가 아키타현으로 이.. 2022. 9. 22.
01. 아무도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바 라운지에는 피아노가 있고 촉촉한 곡이 연주되고 있다. 부스석에 자리를 잡고 앉은 세 사람은 각자 마실 거리를 주문했다. 여위고 키가 크고 피부가 가무잡잡한 시노다 간지는 여든여섯 살, 대머리에 몸집이 작은 시게모리 츠토무가 여든 살이고, 축 늘어진 뺨이 불도그를 연상시키는 데다 숏 보브 스타일의 백발이 남의 이목을 끄는 미야시타 치사코는 여든두 살이었다.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이는 건 두 달 만으로, 그전에도 그다지 띄엄띄엄 만나지는 않았기에 예전과 같다고 세 사람 다 느끼고 있었다. 어쩐지 간단히 옛날로 돌아와 버린 것 같다고. 실제로는 아무도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시절엔 이런 날이 오리라곤 생각 못했는데.” 치사코가 그렇게 말하고 건배하듯 맥주잔을 살짝 들어 보인다.. 2022. 9. 21.
05. “이거 괴물 그림이야.” (마지막 회) 제가 귀의 고름을 닦아주고 다케이치가 저에게 여자들이 반할 거라는 바보 같은 아부를 했을 때, 저는 그저 얼굴을 붉히며 웃었을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실은 어렴풋이 짚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자들이 너한테 반하겠어’라는 속된 말을 듣고 거기에 대고 우쭐대는 느낌으로 ‘듣고 보니 짚이는 게 있어’라고 말하는 건, 만담에 나오는 부잣집 도련님의 대사로도 못 써먹을 만큼 오글거리는 감회를 드러내는 일이기에, 절대로 저는 그런 우쭐대는 마음으로 ‘짚이는 것이 있었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남자보다도 여자가 훨씬 더 난해했습니다. 저희 가족은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았고 친척 중에도 여자가 많았습니다. 또 앞에 말한 ‘범죄’를 저지른 하녀도 있군요. 저는 어릴 때부터 여자들하고만 놀며 자랐다.. 2022. 6. 28.
04. 이제는 내 정체를 완벽히 은폐할 수 있겠구나 두 번째 수기 바닷가. 파도가 들이친다고 해도 될 정도로 바다와 가까운 물가에, 새카만 나무껍질의 커다란 산벚나무가 스무 그루 넘게 쭉 서 있습니다. 새 학년이 시작되면 산벚나무는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끈끈한 갈색 어린잎과 함께 그 화려한 꽃을 피우고, 얼마 후에 꽃잎이 눈처럼 날릴 때에는 수많은 꽃잎이 바다에 흩뿌려져서 수면을 아로새기며 떠돌다가, 파도에 실려 다시 바닷가로 밀려오지요. 그 벚꽃으로 뒤덮인 모래밭을 그대로 교정으로 사용하는 도호쿠의 어느 중학교에 저는 입시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 그럭저럭 별일 없이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 중학교의 교복 모자 배지에도, 교복 단추에도 벚꽃 그림이 피어 있었습니다. 그 학교 바로 근처에 저희 먼 친척분이 살고 계셔서, 아버지가 제게 그 바다와 벚.. 2022. 6. 27.
02. 저는 인간의 삶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첫 번째 수기 부끄러움이 많은 생애를 보내왔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도호쿠 지방의 시골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꽤 자란 다음에야 기차를 처음 보았습니다. 정거장에 있는 육교를 오르내리면서도 그것이 선로를 건너가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전혀 몰랐지요. 선로는 그저 정거장의 구내를 외국의 놀이시설처럼 복잡하고 즐겁게, 유행에 맞게 만들기 위해 설치된 것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것도 꽤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저는 육교를 오르내리는 행동을 상당히 세련된 놀이이자 철도 서비스 중에서도 가장 멋진 서비스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그것이 단순히 여행객들이 선로를 건너가게 만들어 놓은 굉장히 실용적인 계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흥이 깨졌습니다. 또, 어릴 .. 2022. 6. 24.
01. 서문 나는 그 남자의 사진 석 장을 본 적이 있다. 한 장은 그 남자의 유년 시절이라고 해야 하나? 열 살 전후로 추정되는 사진인데, 그 아이가 많은 여자에게 둘러싸여(아마 그 아이의 누나들, 여동생들, 그리고 사촌들인 것 같다) 정원의 연못 근처에서, 굵은 줄무늬 하카마를 입고 고개를 30도 정도 왼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이고 서서 흉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다. 흉하게? 하지만 무딘(말하자면 아름다움과 추함 따위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귀여운 꼬마네요.’ 라고 적당히 입에 발린 말을 해도 아주 빈말로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소위 말하는 세속적인 ‘귀여움’이 그 아이의 얼굴에 있기는 하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내공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얼굴을 한 번 보고 바로, ‘뭐.. 2022. 6. 23.
00. <인간 실격> 연재 예고 『인간 실격』, 행복마저도 두려워했던 한 사람의 고백 역자 후기 일본의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1909~1948)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그가 죽기 직전에 쓰였다. 다소 강렬하고 자극적인 제목의 이 소설은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이미 꽤 유명하다. 긴 시간 동안 다양한 번역서가 나왔고 아직도 많은 이들이 꾸준히 읽고 있다. 여러 차례 영화화도 됐으며, 몇 년 전에는 일본의 유명한 만화가가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만화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인간실격』이 누적 판매 부수 천만 부 이상을 기록하면서 다자이 오사무는 일본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아마 십여 년 전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는 그저 우울한 기질을 지닌 사람의 극단적인 이야기라고만.. 2022. 6. 22.
04. 그건 단순한 병이 아니야 정오 무렵, 아랫마을 의사 선생님께서 다시 오셨다. 지난 번처럼 하카마 차림은 아니었지만, 흰 버선만은 여전히 신고 있었다. “입원하는 게…….” 내가 여쭈자, “아니, 그럴 것까진 없습니다. 오늘은 센 주사를 놓아드릴테니 열도 곧 내릴 겁니다.” 하고 여전히 미덥잖은 대답을 하며, 소위 그 센 주사를 놓고 가셨다. 하지만 그 센 주사가 효험이 있었던지, 그날 정오가 지나자 어머니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며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젖은 잠옷을 갈아입으시던 어머니가 웃으며 말씀하셨다. “명의인가 보다.” 열은 37도로 내려가 있었다. 나는 기뻐서 이 마을에 하나 뿐인 객점으로 달려가 주인아주머니께 부탁해 달걀 열 개를 얻어 바로 어머니께 반숙을 해드렸다. 어머니는 반숙 세개와 죽 반 그릇을 드셨다. 이튿.. 2022. 6. 21.
04. “가즈코가 있어서, 가즈코가 있어 줘서, 이즈로 가는 거야.” 어머니는 놀랄 만큼 늙고 힘없는 목소리로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가즈코가 있어서, 가즈코가 있어 줘서, 이즈로 가는 거야. 가즈코가 있어 주니까.”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엉겁결에 여쭈었다. “제가 없었으면요?” 그랬더니 어머니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셨다. “죽는 게 낫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 집에서, 엄마도, 죽어버리고, 싶어.” 띄엄띄엄 말씀하시다가 끝내 서럽게 우셨다. 어머니는 이제껏 내게 단 한 번도 이런 약한 소리를 하신 적이 없었고, 또한 이토록 애통하게 우는 모습을 보인 적도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내가 시집갈 때도, 배속에 아기를 품고 어머니 곁으로 돌아왔을 때도, 아기가 병원에서 죽은 채 태어났을 때도, 내가 병으로 몸져누웠을 때도, 또 나오지가 나쁜 짓을 했을 때도,.. 2022. 6. 20.
03. “아침부터 정원을 돌아다녔어요.” 저녁 무렵, 어머니와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며 정원 쪽을 바라보는데, 세 번째 돌계단에 오늘 아침 그 뱀이 다시 스르르 나타났다. 어머니도 뱀을 발견하고, “저 뱀은?” 하며 일어나 내게로 달려오시더니 내 손을 꼭 잡고 서서 꼼짝도 하지 않으셨다. 그 말에 나도 문득 짚이는 바가 있어, “알의 어미?” 하고 입에 올리고 말았다. “그래, 맞아.” 어머니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우리는 손을 맞잡고 숨죽인 채 잠자코 그 뱀을 지켜보았다. 돌 위에 구슬프게 웅크리고 있던 뱀은 비틀비틀 다시 움직이는가 싶더니, 힘없이 돌계단을 가로질러 제비붓꽃 쪽으로 기어들어 갔다. “아침부터 정원을 돌아다녔어요.” 내가 작은 소리로 말하자,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시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래.. 2022. 6. 19.
02. “태워버리자.” 어떤 참을 수 없는 부끄러운 생각이 덮쳐 오면, 그 기묘한, ‘아’ 하는 희미한 소리가 터져 나오곤 했다. 방금 내 가슴에 불쑥, 6년 전 이혼하던 때의 일이 선명하게 떠올라 견딜 수 없어져서, 나도 모르게 ‘아’ 소리가 새어 나온 건데, 어머니는 무슨 이유였을까? 어머니한테 나처럼 부끄러운 과거가 있을 리는 없는데. 아니, 어쩌면, 뭔가 있는 건가. “어머니도 방금 뭔가 떠오르신 거죠? 뭐예요?” “잊어버렸어.” “저랑 상관있는 일이에요?” “아니.” “그럼 나오지랑 상관있는 거예요?” “그럴…….” 어머니는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갸웃하더니, “지도 모르지.”라고 하셨다. 동생 나오지는 대학에 다니다 징집되어 남방의 섬으로 갔는데, 소식이 끊겨버린 통에 전쟁이 끝났는데도 찾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이.. 2022. 6. 17.
01. 우리 집안에도 진짜 귀족은 어머니뿐일 거야 “아.” 아침에 식당에서 수프를 한 수저 살짝 떠 드시던 어머니가 희미하게 외마디 소리를 내셨다. “머리카락?” 수프에 뭔가 불쾌한 거라도 들었나 싶었다. “아니.” 어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사뿐히 수프를 한술 입에 흘려 넣으시고는, 새초롬하게 고개를 옆으로 돌려 부엌 창문 너머 활짝 핀 산벚꽃을 바라보더니, 그렇게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다시금 사뿐히 수프 한 입을 조그만 입술 사이로 미끄러트리듯 넣으셨다. 사뿐히, 라는 표현은 어머니에게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여성 잡지 같은 데서 나오는 식사법과는 완전히 다르다. 언제가 남동생 나오지가 술을 마시면서 누나인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작위(爵位, 1869년부터 1947년까지 존재했던 일본의 귀족 제도. 공작·후작·백작·자작·남.. 2022. 6. 16.
00. <사양> 연재 예고 절망과 희망을 함께 담아낸 아름다운 빛, 『사양』 역자 후기 강릉의 해가 저물어갑니다. 분홍빛, 초록빛, 물빛, 주홍빛……. 우주의 아름다운 빛이란 빛들이 모두 모여 하늘을 곱게 물들여 갑니다. 저는 지금 강릉에 있습니다. 작년, 강릉에서 1년살이를 하고 서울로 다시 돌아왔는데, 이 책을 옮기면서 강릉의 해 지는 풍경이 자꾸만 떠올라 번역의 막바지 작업 중, 기차에 올랐습니다. 아마 의아하실 겁니다. 강릉, 하면 일출이 가장 먼저 떠오를 테니까요. 하지만 그곳에 깃들어 살아가는 사람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곳 서쪽 어느 한 호수의 해 질 녘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저녁 무렵 서쪽으로 기울어진 해, 석양. 새로운 것에 밀려 점점 쇠락해가는 것을 비유하는 말. 이 작품의 제목인 ‘사양(斜陽)’의 뜻입니.. 2022. 6. 15.
05. 다스 게마이네_“무슨 말이든 좋아. 할 마음은 있는 건가?” 3. 등용문 여기를 지나면 하나에 2전짜리 소라가 있으려나 “뭔가 터무니없는 잡지라고 하던데요.” “아뇨, 평범한 팸플릿이에요.” “바로 그런 말을 하는군요. 당신에 관한 이야기는 정말 많이 들어서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지드와 발레리를 꼼짝 못하게 할 잡지라면서요.” “당신 여기 비웃으러 왔습니까?” 내가 잠깐 아래층으로 내려간 사이에 벌써 바바와 다자이가 말다툼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다기를 들고 방으로 갔더니 바바는 방구석 책상에 턱을 괴고 아무렇게나 앉아 있고, 다자이라는 남자는 바바와 대각선으로 마주 본 다른 한쪽 구석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가늘고 긴 털이 수북한 정강이를 앞으로 뻗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졸린 듯 반쯤 감긴 눈에 매우 나른한 듯 느릿느릿한 말투였지만, 속에선 분노와 살기로 .. 2022. 6. 10.
04. 다스 게마이네_“그래도 그 녀석의 그림만은 정정당당히 인정해줘야 해.” 2. 해적 사타케는 작은 소리로 말하고 손목에 찬 금시계를 꽤 오래 바라보며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눈치였지만, “히비야에 신교향곡을 들으러 가려고. 고노에도 요새 상술이 좋아졌단 말이야. 내 옆자리엔 늘 외국인 아가씨가 앉는다니까. 요즘은 그게 낙이야.” 하고 말을 끝내자마자, 쥐처럼 가벼운 몸놀림으로 쫑쫑 달려갔다. “쳇! 기쿠야, 맥주 좀 줘. 너의 미남이 가버렸어. 사노 지로, 마시자. 내가 시시한 놈을 끌어들였네. 말미잘 같은 놈. 저런 놈이랑 싸우면 별짓 다 해도 못 이겨. 손 놓고 가만있어도 내가 날린 주먹에 그냥 척 달라붙어 버린다고.” 바바는 갑자기 진지하게 목소리를 낮추고 “그 녀석, 기쿠 손을 막 움켜잡더라니까. 저런 놈이 남의 부인을 쉽게 가로채는 거야. 내심 고자가 아닐까 싶은데.. 2022. 6. 9.
03. 다스 게마이네_나폴리를 보고 나서 죽어라! 2. 해적 Pirate라는 단어는 저작물을 표절한 사람을 가리킬 때도 쓰이는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냐고 내가 묻자, 바바는 즉시 더 재밌겠다고 대답했다. Le Pirate, 일단 잡지 이름은 정해졌다. 말라르메나 베를렌이 관여한 , 베르하렌 일파의 , 그 외 , 모두 이국의 예술 정원에 핀 새빨간 장미꽃이다. 과거 젊은 예술가들이 세상에 알린 기관 잡지. 아아, 우리도 해보자! 여름방학이 끝나 서둘러 상경했더니 바바의 해적 열기는 더욱더 뜨거워져 있었고, 마침내 나까지도 감염되어 우리는 모였다 하면 에 대한 화려한 공상을, 아니 구체적인 계획을 주고받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1년에 네 번씩 발행. 국배판 60쪽. 전부 아트지. 클럽 회원은 해적 유니폼을 입고 가슴에는 꼭 제철에 맞는 꽃을 꽂을 .. 2022. 6. 8.
02. 다스 게마이네_바바가 편지를 보내왔다. 1. 환등(幻燈) 아아, 말하다 보니 무심코 이실직고해버렸다. 결국, 그 무렵의 나는 아까도 잠깐 말했듯이 금붕어 똥처럼 의지력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생활을 했다. 금붕어가 헤엄치면 나도 쫄래쫄래 따라가는 똥처럼 바바와의 만남을 허무하게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팔십팔야(● 八十八夜. 입춘일로부터 88일째 되는 밤.)였다. 이상하리만치 바바는 달력에 꽤 민감해서, 오늘은 경신년의 불멸일(●佛滅日. 부처도 멸할 정도로 매우 불길한 날.)이라며 풀이 죽어 있는 날이 있다가도, 오늘은 단옷날이니 어둠 축제(● 등불을 끄고 제례를 지내는 축제.)라는 둥,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렸다. 그날도 나는 우에노 공원의 단술집에서 새끼 밴 고양이, 벚나무, 꽃보라, 송충이, 그런 풍경이 자아내는 .. 2022. 6. 7.
01. 다스 게마이네_당시, 내게는 하루하루가 만년(晩年)이었다. 1. 환등(幻燈) 당시, 내게는 하루하루가 만년(晩年)이었다. 사랑을 했다. 태어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전에는 내 왼쪽 옆모습만을 보이며 나의 남자다움을 내세우고자 조바심을 냈고, 상대가 단 일 분이라도 망설이면 나는 금세 어쩔 줄 몰라 하며 거센 바람처럼 달아났다. 하지만 당시 매사에 야무지지 못했던 나는, 내 몸에 달라붙어 있다고 여긴, 상처를 최소화하는 그 현명한 자기방어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이른바 절도 없는 사랑을 했다. 사랑하니까 어쩔 수 없다는 목쉰 중얼거림이 내 사상의 전부였다. 스물다섯. 나는 지금 태어났다. 살아 있다. 끝까지, 살아가리라. 진심이다. 사랑하니까 어쩔 수 없다. 그런데 나는 처음부터 환영받지 못했던 듯하다. 정사(情死)라는 낡은 개념을 몸으로 서서히 이해하기 시작했.. 2022. 6. 6.
00. <달려라 메로스> 연재 예고 다자이 오사무의 새로운 매력이 담긴 아홉 개의 반짝이는 조각들 역자 후기 이 작품집에는 표제작인 「달려라 메로스」를 포함하여 다자이 오사무가 1935년부터 1943년까지 발표한 총 아홉 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각각 독립된 단편으로 이루어진 작품집이라 사실 처음부터 읽지 않아도 크게 상관은 없지만, 다자이의 미묘한 내면의 변화를 느껴보고 싶다면 이 책에 소개된 작품 순서대로 차근차근 읽어볼 것을 추천합니다. 먼저 첫 번째 단편 「다스 게마이네」는 1935년 10월 에 발표된 작품입니다. ‘다스 게마이네(Das Gemeine)’란 독일어로 ‘통속성, 비속성’을 뜻합니다. 이 소설은 다자이 오사무를 비롯한 제1회 아쿠타가와상 후보자 네 명이 의 청탁을 받아 쓴 것으로, 소설 속에도 ‘해적’이라는 잡지를 .. 2022. 6. 3.
10. 레이나는 어디든 갈 거야 (마지막 회) “다음은 어떻게 하고 싶어?” 이츠카짱이 묻는다. 보스턴 커먼 ― 호텔 앞에 있는 공원 이름이었다 ― 안을 산책하고 벤치에 앉은 참이다. 눈앞의 연못 물은 탁한 녹색이고 연못가에는 개구리 동상이 자리 잡고 있다. “이츠카짱은?” 벌써 10월인데 바지 자락을 걷어 올리고 그 얕은 못에 들어가 노는 아이가 있다. 그 곁에는 엄마로 보이는 여자도 있었는데 강아지 리드 줄 같은 것을 아들의 허리에 매고 그 한쪽 끝을 손으로 감아쥐고 있었다. 아이는 장난감 양동이와 물뿌리개를 들고 있다. 레이나는 남동생인 유즈루를 떠올렸다. 연못 안의 아이는 유즈루보다 어렸지만. “난 다 좋아, 뭘 하든 안 하든.” 이츠카짱이 말한다. “왜냐면,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여행은 하고 있는 거니까.” 그건 그렇다고 레이나도 생각한다.. 2022. 2. 1.
08. 바라는 게 없으면 실망할 일도 없을 텐데 햄버거는 맛있었다. 가이드북에 ‘보스턴 명물’로 추천되어 있던 클램 차우더는 이츠카 입에는 너무 짰지만. 멀리 오클라호마에서 왔다는 세 사람은 퍼거스와 마크가 대학생으로 열아홉 살, 리비가 생협에 근무(본인 왈, ‘공부에 취미가 없어서’ 대학에는 가지 않았단다)하며 스물한 살이었는데 그 나이치고는 어처구니없을 만큼 바보스러운 짓들을 ― 먹다 말고 갑자기 기성을 지르는가 하면 서로 팔꿈치로 상대방을 쿡쿡 찌른다든지, 누군가의 접시에 놓인 감자를(자기 몫도 아직 남아 있으면서) 잽싸게 빼앗아 먹는다든지 ― 했지만, 기본적으로 나쁜 아이들은 아닌 듯 보였다. 작년 여름에도 이곳에 고래를 보러 왔다는데 예의 고래 관광선에 관해서도 상세히 알려 주었다. 특히 리비의 남동생인 마크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친절하게 설.. 2022. 1. 30.
07. 고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몸이 차가워져 있던 터라 목욕을 하기로 한 건 아주 좋은 생각이었다. 욕조 물에 몸을 담근 채 향긋한 비누로 팔다리를 씻으면서 레이나는 그리 생각했다. 욕실은 넓고 청결하고 쾌적하다. 다만 방에 혼자 있다고 생각하니 불안하기도 했다. 산책 나간 사촌 언니가 얼른 돌아와 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 배가 엄청 고프지만, 좀 있다 레스토랑에 간다(리비 일행과 약속한 가게 이름은 ‘파이브 버거스’니까 아마도 햄버거를 먹게 되겠지)는 것을 알기에 배가 고픈 것도 이제는 즐거웠다. 게다가 고래! 고래를 볼 수 있다니 ‘굉장한 일’이다. 크고, 힘세고, 귀여운 얼굴에 정직하다는 것이 레이나가 생각하는 고래다. 정직에 관해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레이나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그런.. 2022. 1. 29.
05. ‘본다’는 것은 유일한 ‘Yes’다. 장거리 버스의 뱃속에 짐들이 차곡차곡 실린다. 그러나 이츠카는 자신들의 차례가 되자 짐을 맡기길 거부했다. 다른 승객들의 짐에 비해 자신들의 짐은 훨씬 작기도 했고 이것저것 중요한 물건이 들어 있어서 손닿지 않는 곳에 놔두고 싶지 않았다. 수염을 기른 중년 직원이 목을 살짝 움츠리더니, 그럼 그냥 타라고 말하는 듯이 엄지로 어깨 뒤를 가리킨다. 30번 게이트는 지하 2층으로 밤처럼 형광등이 적막하게 비추고 있다. 바깥의 맑은 하늘이 거짓인 양. “먼지 냄새 나.” 차에 오르면서 레이나가 말한다. “그보단, 디젤 엔진 냄새 같은 걸.” 이츠카가 대답했다. 냄새는 코라기보다 입으로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차 안 전체가 보이는 자리여야 안심이 될 것 같아서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는다. 저마다 배낭을 무릎 .. 2022. 1. 27.
04. 여행이 끝날 때까지는 절대 돌아가선 안 된다. 여덟 시에 일어날 예정이었는데 레이나가 눈을 떴을 때는 일곱 시도되기 전이었다. 블라인드 탓에 방 안은 어둡다. 그래도 사물의 형체가 전부 또렷이 보일 정도로는 밝았다. 옆 침대에서 자고 있는 이츠카짱이 깰세라 살그머니 창가로 간다. 블라인드 옆 틈새로 바깥을 보니 이미 해님이 떠올라 있었다. 화장실에 다녀온 후 욕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찬찬히 본다. 많이 큰 목욕 가운을 입고 선 것은 분명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자신인데 지금 집을 떠나 이런 장소에 있다는 것이 어쩐지 믿어지지 않았다. 레이나 방에서 수도 없이 작전 회의를 했을 때 ― 그 방! 바로 어제까지 그곳에 있었으면서 벌써 그리워진다 ―, 이츠카짱과 둘이서 이번 여행에 관한 여러 가지 규칙을 정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이 밖에도 몇.. 2022. 1. 26.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