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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205

05. 사진가의 사죄 행복하지 않았다.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순도 100퍼센트, 무균의 공간에서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을 탐구해보고자 했는데, 막상 도쿄의 오치아이 방에 자리를 잡자, 편의점에서 고른 아이스크림을 코앞에 대고 ‘이것은 나쁜 걸까’ 하고 급히 엔을 환전해 보고는 가격이 비싼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이 마치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는 엄마의 수면시간을 빼앗는 것처럼 불편하기만 했다. 피하지 못하던 자기 검열이 바다를 건너까지 따라올 줄은 몰랐다. 그랬다. 도쿄에서 문화적 자극으로 긴장은 하면서도 대부분 행복했지만, 어째서인지 『죄와 벌』의 마르멜라도프처럼 한번 죽어본 심정으로 우울한 자신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깨알 같은 걱정이 나의 고단한 이마에 새겨.. 2022. 3. 12.
07. 피렌체_어느 실업자의 죽음 유배지 같은 그 시골 마을에서, 저녁이면 푸줏간 주인이나 벽돌공들과 어울려 카드놀이를 하고 사소한 다툼을 하며 불한당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던 그의 편지는 몹시 마음 아픈 구석이 있다. 그렇게라도 또 다른 일상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밤이면 몸을 정제하고 관복으로 갈아입은 후 서재에서 글을 써 내려간 마키아벨리. 그렇게 보내는 네 시간 동안 “모든 고뇌를 잊고, 가난도 두렵지 않게 되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느끼지 않는다”던 그는 위대한 정치 철학자이자 위태로운 조국 이탈리아를 걱정한 사상가였음이 틀림없지만, 어쩌면 평범한 생활인으로 살아가기를 가장 열망했을지도 모르겠다. 철저히 현실적이고 계산된 정치론으로 인해 권력자들을 위한 조언자, 권모술수를 가르치는 악의 화신으.. 2022. 3. 12.
04. 우체국의 마리 아줌마 동화작가의 영혼을 가진 우체국 아줌마와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에는 여러 버전이 준비되어 있다. 왜냐하면 아줌마와 나는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편집하는 능력을 즐기기 때문이다. 마치 하루종일 노래하는 새처럼 우리는 서로의 머리 위로 말풍선이 떠다닌다는 걸 첫눈에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우체국 아줌마는 시간여행자로서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를 만나러 온 것 같았다. 우리는 마주 본다. 그리고 정해진 대사를 정해진 순서에 따라 말한다. 마치 운명처럼. “80엔입니다.” 우체국 아줌마가 창구에서 국제우편에 도장을 찍으면서 말한다. 내가 동전을 세어서 건네주자 우체국 아줌마가 누구에게 그렇게 편지를 쓰는가 묻는다. “가족과 친구들이요.” 어느 날인가 한국으로 보낼 편지를 들고 오치아이 우체국 창구에 줄을 서 있자 우체.. 2022. 3. 12.
06. 로마_달콤한 삶은 어디에 있는가? 성스러운 길, ‘Via Sacra’라 이름 붙여진 거리를 걸어 고대 로마의 중심지 포로 로마노에 도착했다. 뜨거운 태양 아래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비. 티투스의 개선문 아래에서 여우비를 피하러 모여든 몇몇 여행자들끼리 가벼운 인사를 나누었다. 여행하다 보면, 서로 눈만 마주쳐도 웃음 짓게 되고 이야기를 꺼내게 되는 특별한 경험을 자주 하게 된다. 대화를 나눌 순간, 혹은 그와 동행중인 침묵을 지켜줘야 할 순간을 구별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여행으로 터득하게 되는 값진 미덕 중의 하나일 것이다. 무성한 잡초와 고양이들, 귀퉁이만 남은 처마를 위태롭게 이고 있는 기둥, 여기저기 나뒹구는 건축물들의 잔해, 머리가 없는 조각상, 초라한 카이사르의 무덤, 폐허라기엔 여전히 압도적인 느낌을 주는 공공 광장. 찬란.. 2022. 3. 11.
03. 마지막 기억 새벽에 메모해 둔 종이에서 나는 소리는 좀 특별한 데가 있다. 나는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가 지금 막 깨어났다. 마침내 헌책방 아저씨와의 마지막 만남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국제전화를 끝으로 아저씨와 마지막 대화가 될 뻔했으나 나는 아저씨와의 만남을 그런 식으로 끝맺을 수는 없었다. 그해 나는 자비로 도쿄도서전에 갔다. 비행기표 예매를 하는 동시에 오치아이의 주인집 아줌마에게 빈방이 있으면 며칠 빌리고 싶다는 내용의 국제전화를 걸었다. 아줌마는 반가워하면서(내가 만든 김치를 좋아했다) 내가 살던 방은 다른 사람이 세 들어 살고 있으니 1층 아들 방을 쓰라고 했다. 마침내 아저씨를 만나러 나카이 역에 내렸다. 아저씨는 많이 야위어 있었고, 역시 말수도 적었지만, 기뻐했다. 아저씨는 나에게 들고나온 걸 전해주었.. 2022. 3. 11.
02. 오치아이의 방 방 하나를 소유한다는 것, 그것도 이국에서 자신의 몸을 눕힐 방 하나를 가진다는 건 생각했던 것보다 쉬웠다. 그것은 까다로운 일본의 부동산 문화 때문이었다. 계약 기간이 만료되기 전에 이사를 가고 싶었던 오치아이의 방 세입자가 집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와 새 계약서를 썼다. 나는 4조반의 다다미방을 얻기 위해 선불 월세 2만9천 엔과 보증금 2만9천 엔, 그리고 방을 빌려주어서 감사하다는 명목의 ‘레이킹’으로 5만8천 엔을 지불했다. 엔화 환율을 100엔 기준 1000원으로 했을 때 약 120만 원 정도를 가지고 방을 얻는 데까지는 좋았으나, 그 방에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벗어날 수는 없었다. 눈을 감으면 오치아이의 네모난 방 하나가 떠오른다. 다다미 4조반의 공간에 한국에서 가져온 솜이불 한 채가 .. 2022. 3. 10.
05. 신트라_비밀의 숲의 은둔자 거친 바다 앞에 선다는 것은, 지나간 모든 고통과 은총 앞에 숙연해진다는 것. 해와 달의 사연이 바다의 깊이를 바꾸고, 가까웠다가 멀어지는 타원의 궤도 위에서 바람이 불고 청춘이 졌다. 언제쯤이었나. 휘몰아치는 파도 앞에 서서 저 바다 너머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믿기 힘들었던 때. 여기가 정말 세상의 끝이 아니라면, 이렇게 해져버린 돛을 매달고 저 거친 바다를 아직 더 표류해야 한다는 것인지. 얼마나 부지런히 따라잡아야 늘 달아나버리는 경계에 닿을 수가 있나. ‘땅의 끝’, ‘세상의 끝’이라 불리던 그곳에 가보고 싶었다. 카보 다 호카(Cabo da Roca). 카보는 곶이고, 호카는 ‘미친 사람’이란 뜻이니 우리말로 ‘미친 사람의 곶’이다. 그렇겠지. 세상의 끝에 서 있는 자, 곧 미친 사람이었을.. 2022. 3. 10.
01. 헌책방 시바타 아저씨 헌책방 아저씨는 낡은 다다미방에서 개 한 마리와 생활했다. 아저씨는 늘 술에 취해 있었다. 작은 헌책방 안은 정리가 안 된 책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가끔 가격을 물으며 아저씨를 바라볼 때면 장사에는 통 관심이 없다는 얼굴로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지금 생각하면 책 뒤에 연필로 가격이 적혀 있었는데 나는 왜 몰랐을까. 아니면 적혀 있지 않은 책도 있었던 걸까. 니혼대학 예술학부 청강생 시험을 통과하고 6개월 만에 어학원을 졸업한 나는 대학에서 청강하고 있는 다섯 과목을 듣는 것 이외에는 아무 할 일이 없었다. 하루종일 말 한마디 안 할 정도로 고독한 시간. 이어령 선생님의 『축소지향의 일본인』 일본어판을 서점에서 산 것도 그때 즈음이었다(이 책은 시미즈 선생님이 빌려 가서 내가 귀국한 후에야 돌려주었.. 2022. 3. 8.
04. 리스본_늙은 친구 같은 도시에서 전망대나 언덕 위의 계단에 앉아 멀리 푸르른 타호 강과 저물녘의 하늘을 바라보던 날들. 포르투갈 맥주인 사그레스(Sagres: 정말이지 최고의 맥주!) 한 병 외엔 아무것도 필요 없었던 시간. 16세기의 화려한 유산 제로니무스 수도원이나 리스본 대성당, 로마 시대 요새였던 상 조르지 성 등 리스본을 대표하는 명소들을 다 둘러보았지만, 내겐 좁고 투박하기 그지없던 골목에서의 시간이 진짜 리스본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자신들의 도시만큼이나 오래되고 지쳐 보이면서도 순수한 미소를 간직하고 있던 사람들. 유럽에서 리스본을 ‘늙은 조강지처 같은 도시’라 부른다더니, 나에겐 마치 시간을 감아 마주한 늙은 친구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무언가 아득하면서 전혀 낯설지 않은, 포르투갈의 천재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가 『불안의 .. 2022. 3. 8.
00. <동경인연> 연재 예고 동경인연(東京因緣)에 대하여 우리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의미를 깨닫는다. 그 시절 그곳 그 인연은 그저 추억의 한 자락으로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완성해주는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이 되기도 한다. 일본문학 번역가이자 에세이스트인 이은주는 『나는 신들의 요양보호사입니다』와 『오래 울었으니까 힘들 거야』에 이은 세 번째 에세이 『동경인연』에서 삶의 큰 강을 건널 용기를 주었던 젊은 날의 한 페이지를 열어 보인다. 그 속에는 문학이 있었고, 열정과 우정이 있었고, 배려와 사랑이, 사람들이 있었다. 이은주의 청춘의 키워드는 문학과 일본이었다.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에도 주저앉지 않고 도전정신으로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동경의 오치아이 4조반 다다미방을 거처로 삼고, 일본대학 예술학부 문예학과에서 문.. 2022. 3. 7.
10. 줄리아가 없는 호텔은 가고 싶지 않아요. (마지막 회) 리츠칼튼 호텔의 손님들은 부지런히 고객 카드를 썼다. 좋은 점, 나쁜 점, 개선할 점, 보완할 점 등 가감 없이 의견을 냈고 직원들에 대한 평가도 빠뜨리지 않았다. 나는 고객 카드를 가장 많이 받은 ‘고객 카드 퀸’이었다. 8세 어린이부터 나이 많은 단골손님까지 많은 손님들이 카드와 편지를 주었다. 스트레스가 쌓이고 호텔업에 회의가 들 때마다 나는 이 카드와 편지들을 꺼내 보았다. 자리에 앉아 상자 속에 담긴 카드들을 하나씩 읽고 나면 다시 일하러 갈 에너지가 생겼다. 친절하고 교양 있는 손님들도 많지만 호텔은 뭐든 다 해 주어야 한다는 진상 손님, 까칠하고 불평불만에 요구사항 많은 손님들을 대할 때면 ‘이 일을 왜 하나, 그만둬야지’ 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되뇌었다. 육체적으로 하루 종일 서 있는 것도.. 2022. 3. 7.
03. 그라나다_안달루시아의 태양을 닮은 남자 단순한 존재조차 기쁨으로 만들어주는 탄력. 안달루시아는, 그랬다. 마지막 날. 비행기까지 직접 걸어가야 하는 작디작은 그라나다 공항 출국장에 앉아, 이 곳을 떠나기가 싫구나, 혼자서 얼마나 되뇌었는지. 1936년 여름, 그라나다의 언덕 위. 한 그루 올리브 나무 아래에서 몇 발의 총성이 울렸다. 독재자 프랑코의 군인들에게 갑작스레 처형당한 작가 로르카의 죽음은 전 세계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영화 는 바로 거기에서 출발한다. 로르카의 시와 희곡에 빠져 있던 그라나다 소년들. 그들 중 한 명이 훗날 유명작가가 되어 자기를 문학의 세계로 이끌었던 로르카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밝혀내려 한다. 그때까지도 계속되고 있던 독재정권은 온갖 협박과 술수를 동원하여 그의 추적을 방해 하는데…. 영화 속 눈 덮인 .. 2022. 3. 7.
02. 마드리드_나를 피곤하게 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산다는 것 다시, 사랑을 잃는 것이 곧 죽음인 사람들이 있다. 거대한 우주 속, 지구 표면의 한 점 먼지 같은 자신의 존재를 오직 사랑의 이름으로 확인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사랑의 끝이 곧 죽음인 것은, 삶을 걸기 때문이다. 죽도록 사랑하기 때문이다. 마드리드 출신의 작가 마리아노 호세 데 라라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우연히 알게 된 라라의 삶에 관심이 생겨 단편적인 글들과 책까지 찾아 읽게 되었었다. 또 사랑인가. 그 끝은 역시 죽음. 필명 ‘피가로’. 19세기 초의 시인이자 평론가. 스페인 로맨티시즘을 대표하는 인물. 여기까지가 라라의 이력에 대해 알려진 바인데, 『열정』(로사 몬떼로 著)이란 책에 따르면 그는 대단히 총명했고(18세에 풍자비평집을 냈다), 권력과 관습에 대항하는 자유주의적 사상가이면서 때로 대.. 2022. 3. 6.
01. 바르셀로나_한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잊을 수 없다.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확실하다. 한순간 몰래 훔쳐보고 만 불가침의 영역. 위협적일 만큼 너무도 분명하지만, 어쩌면 무서운 속도로 해체되어버린 간밤의 짧은 꿈같은, 모순에 찬 놀라움. 나는 그 어떤 언어로도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 church, 성가족성당)를 마주한 순간의 경이로움을 설명할 수 없다. 전철역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온 뒤, 무심코 바라본 그곳에 가우디(Antoni Gaudí)의 성당이 서 있었다. 괴물 같은 입을 벌리고, 아니 내 어린 시절 상상했던 기묘하고도 장엄한 세계의 문을 열고. 얼어붙은 발걸음. 상상은 현실이 될 수 있는가? 이 모든 세상의 희비극 속에서도 인간의 꿈과 집념은 끝내 신에 가닿을 수 있는가? 그렇다고 말하겠다. 보.. 2022. 3. 4.
00. <고독한 사람들의 도시> 연재 예고 유럽의 골목길에서 그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prologue 이런 책을 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 같은 사람이 장거리 여행을 다니게 된 것만도 기적 같은 일이었으니까. 대학 시절 가장 친했던 친구가 다른 친구와 배낭여행을 다녀왔을 때, 왜 내겐 말 한마디 없었는지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니가 어디 낯선 데 돌아다닐 위인이냐?” 생각해 보면, 나는 낯선 곳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기 보다 삶 속의 변수를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세상의 위험과 혼란을 피해, 익숙한 나만의 공간 속에서 침잠하며 살아가는 것. 그런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나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 어느 날 문득 배낭을 메고 길 위에 섰고, 타이완에서 시작해 점점 더 먼 곳으로 떠나게 되었다. 프라하에서 환.. 2022. 3. 3.
09. 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링 위에 오른다는 것 운 좋게 기회를 잡아 물 건너 미국에 오기는 했지만 학창 시절부터 나를 괴롭힌 영어는 여기 와서까지 나를 힘들게 했다. Stationery 사건 이후부터 뭔가 내가 맡은 일에 문제가 생기면 은연중에 내 영어 실력을 탓하는 시선을 느껴야 했다. 언어라는 게 하루아침에 술술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어가 완벽해지기 전까진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었다. 호텔 일이 컴퓨터나 기계로 하는 일이 아니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 언어로 소통하는 일이 기본이다 보니 영어를 잘 못하는 것은 무능력이면서 민폐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이 약점을 행동으로 보완하려 남들이 하기 꺼려하는 일을 도맡아 했다. 그런데 육체노동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이 딱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전화 받기였다. 얼굴을 보고 말을 하면 상대의 표정이.. 2022. 3. 3.
08. 줄리아가 또 사고를 쳤구나... 나는 그저 하루를 무탈하게 보내길 기도했다. Stationery 사건을 겪고 나선 ‘아무 일 없이 지나가기’가 소원이었다. 컴플레인만큼은 정말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사건이 또 닥쳤다. 이번 일은 손님과 내가 서로 쿵짝이 맞지 않아 생겼다. 한 VIP 손님이 내게 엽서가 들어갈 만한 열 장의 봉투를 건네며 함께 온 회사 임원들 방으로 전달해 줄 것을 요청했다. 나는 벨맨에게 봉투 배부를 부탁했다. 그런데 오후 다섯 시가 넘어서 그가 화가 난 얼굴을 하고 나를 찾아왔다. “왜 카드를 미리 전달하지 않았죠?” 나는 영문을 몰랐다. 카드를 전해 줘야 하는 시간을 특정했던가? 그는 숨을 거칠게 쉬며 이 봉투가 다섯 시에 열린 칵테일파티 초대장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무도 오지 않는 리셉션 장소에서 혼.. 2022. 3. 2.
07. 당신이 있어 호텔을 다시 찾을 것입니다. 호텔 직원으로서 의사소통이 안 되는 건 중대한 결격 사유니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VIP에게 컴플레인까지 받았으니 근무 자격 미달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이 되어도 호텔 측에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출근했다. 설사 내가 이곳에서 잘린다고 하더라도 그 손님에게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다. 그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에게 미안함을 표현하는 행동을 취하는 것이었다. 리츠칼튼에는 손님이 말하지 않아도 손님에게 만족스러운 환경을 갖추기 위해 데이터를 구축해 둔다. VIP 손님 정보를 기록한 데이터베이스를 살펴봤다. 그는 보스턴에 있는 회사 임원이고 아들 셋을 두었으며 커피는 무설탕 감미료를 넣어 마시고, 신문은 월스트리트 저널을 선호한다.. 2022. 2. 28.
06. 서투른 영어가 컴플레인을 불러오다. 리츠칼튼 본사에 채용되는 놀라운 행운을 누리게 되었지만 나는 영어에 자신이 없었다. 생활 영어도 완벽하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전문적인 단어가 섞이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실 영어가 내 발목을 잡은 게 이번에 처음은 아니었다.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학창 시절 내내 가장 못한 과목은 영어였다. 세계 각지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을 상대해야 하는 호텔 직원이라면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은 기본 중에 기본이다. 특히 리츠칼튼 같은 일급 호텔은 적지 않은 돈을 내고 투숙하는 손님들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손짓 발짓을 해 가며 스태프에게 이해시키는 수고를 하기 원치 않는다. 그러니 영어 때문에 곤혹스러운 나는 매 순간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그랬음에도 결국 VIP 손님에게 큰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영어 단어.. 2022. 2. 26.
05. 한국이 어디야? 왜 영어를 못해? 미국에서 나의 첫 근무지가 된 아멜리아 아일랜드는 플로리다주의 북쪽, 조지아주와 가까운 대서양에 인접해 있는 조그마한 섬이다. 겨울 최저 기온이 7도이고 여름 최고 기온은 30도 정도여서 플로리다주의 남쪽 도시만큼 항상 덥지만은 않다. 습도가 늘 60% 이상이어서 공기가 끈적끈적하다. 당시 아멜리아섬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섬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많았을 정도로 교류가 적은 곳이었다. 외지인들도 거의 없고 흑인도 손꼽을 정도였다. 당연히 한국인은 이 섬에 나 혼자였고 중국인 한두 명이 살고 있는 정도였다. 이들은 한국이라는 나라는 당연히 모르고 내가 왜 영어를 잘 못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매일 섬을 걸어 다니다 보니, 그 작은 섬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워낙 작은 섬이어서 주변 동료들은.. 2022. 2. 25.
04. 비자 발급을 거부당하다. “줄리아, 혹시 미국의 리츠칼튼에서 근무해 보고 싶지 않아요?” 미국 본사 리츠칼튼에서 제안이 들어왔다. “당연히 근무해 보고 싶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돈도 벌고 영어도 배울 수 있는 기회 아닌가! 그러나 가고 싶다고 무조건 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엄마의 반대가 극심했다. 90년대 중반 우리나라에서 미국의 이미지는 상당히 험악했다. 보수적인 엄마의 시선에서 미국은 마약과 총기가 난무하는 무법천지의 나라였다. 엄마는 단 한 푼도 도와줄 수 없다고 선언했다. 나는 독일에서 피아노 연주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은 돈과 리츠칼튼 서울에서 받은 첫 월급을 모아 비행기 표를 샀다. 엄마는 내가 공항에 나가는 날까지 화를 내며 나와 보지도 않았다. 또 다른 장애물은 비자였다. 지금 젊은 세대에겐 믿기 힘들겠지.. 2022. 2. 24.
03. 미국에서 근무해 보고 싶지 않아요? 독일에 머물며 호텔 로비에서 피아노 연주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 호텔을 A부터 Z까지 공부하고 싶다는 의지가 생겼다. 호텔에 취직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나의 생각을 아는 듯 친구가 곧 오픈할 리츠칼튼 호텔에 지원을 할지 고민 중이라는 얘기를 했다. 리츠칼튼은 당시 최고급 호텔이었다. 주저할 것 없이 친구를 설득해 리츠칼튼에 같이 지원을 했다. 호텔이 새로 들어서면 개관 6개월 전부터 직원 채용을 시작하기에, 두 달 전에 들어간 건 막차를 탄 셈이었다. 그때만 해도 이 하찮아 보이는 직무가 나를 미국으로 데려갈 오리엔트 익스프레스 열차가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리츠칼튼은 아시아에 처음 생기는 리츠칼튼 서울에 대단한 정성을 기울였고, 세계 여러 지점의 총지배인과 부지배인 150명을 서울에 .. 2022. 2. 23.
07. 꼰대의 시간은 흐른다. (마지막 회) 몇몇이 모이는 작은 동창 모임에 나갔다. 오래된 기억들을 짜 맞추는 재미를 술안주 삼아 마시고 떠드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갑자기 분위기가 썰렁해진 건 한 동창생이 자신의 딸 이야기를 꺼내면서다. 딸이 사춘기가 되면서 아빠를 대하는 태도가 예전과 달리 냉랭하기 짝이 없고, 무시당하는 것이 괘씸해 죽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좌중 여기저기서 “너도 그렇다니 다행이다. 우리 애도 그렇다!” 혹은 “그건 약과다. 나는 이런 꼴까지 당하며 산다!”는 피해사례가 앞을 다투어, 추임새처럼 장단을 맞추고 든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문제가 점점 커졌다. 말이 위험수위를 넘나드는가 싶더니 듣기 거북한 막말로 흐르고 급기야 옆에서 입을 틀어막기에 이르렀다. 앞뒤가 온전치 않은 지저분한 말들이었다. “아내가 둘째를 원하지.. 2022. 2. 22.
02. 피아노 한번 쳐 보지 그래요? 화려해 보이는 내 커리어는 내 상상 밖에서 시작되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한 호텔에서 말이다. “피아노 한번 쳐 보지 그래요?” 내게 그렇게 물은 건 피에르가르뎅 유럽 담당 영업본부장이었다. 당시 나는 대학을 막 졸업하고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사는 고모 댁에 머무르며 어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어학원에 다니면서 고모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을 도왔다. 숙식을 제공하는 고모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어서였다. 어느 날 피에르가르뎅 유럽 담당 영업본부장이 고모 가게에 찾아왔다. 신제품 소개도 하고 판매 추이도 얘기하는 정기 방문이었다. 고모는 나를 데리고 그와 함께 시내에서 가장 유서 깊은 슈타이겐베르거 프랑크푸르트 호프 호텔에 차를 마시러 갔다. 차를 마시다가 프랑스인 영업본부장이 내게 물었다. “주현 씨.. 2022. 2. 21.
06. 보리차를 끓이며 분리수거를 하려고 집안에 쌓여 있는 재활용 쓰레기를 주섬주섬 챙긴다. 플라스틱 생수병이 너무 많아도 너무 많다. 부피를 줄여보겠다고 찌그러뜨리긴 하는데, 그 정도로는 쓰레기로 몸살을 앓는 지구에 그다지 위로가 될 것 같지 않다. 나도 덩달아 체증에 걸린 듯 마음이 개운치 않다. 크리스 조던이라는 미국의 환경미술가가 있다. 그는 태평양의 미드웨이 제도에 수년간 머물며 사진을 찍고 영상을 만들었다. 그의 다큐멘터리는 인간이 자연을 훼손하고 기만해 온 참담한 현장을 파헤치고 있다. 무분별하게 버려진 플라스틱과 비닐들이 해류를 타고 바다 위를 떠다니다 앨버트로스(Albatross)의 서식지에 고여 생태계를 변질시킨다. 잔혹하고 날카로운 변화의 칼끝이 돌고 돌며 인간을 비롯한 온 지구를 통째로 위협하게 된다. 우.. 2022. 2. 21.
01. 희망 없이 털썩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20여 년 전 미국 아멜리아섬의 리츠칼튼 호텔 VIP층 라운지에서는 아침 일곱 시가 되면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흘러나왔다. 음악을 튼 사람은 항상 나였다. 나는 거의 매일 새벽 네 시 반에 일어나 빠르게 출근 준비를 하고 45분을 뚜벅뚜벅 걸어 호텔에 여섯 시 전에 도착했다. 바로 라운지 오픈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일곱 시 시계 종이 울리면 바흐 음악을 틀면서 라운지의 문을 열었다. 그 호텔을 떠난 지 20년이 훌쩍 넘었다. 나는 지금 서울에 살고 있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이어폰에서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흘러나왔다. 한동안 일부러 피하고 듣지 않았었다. 일어나기 싫었던 새벽, 곧 마주칠 손님들, 영어를 잘 못해 늘 가슴 졸이던 나의 일상이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 2022. 2. 20.
05.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미카엘 중1담임 김정현쌤' 낯익은 발신자 표시를 보고 가슴이 철렁한다. 디딘 바닥이 일순간에 저 시꺼먼 아래로 꺼져 내리는 기분. 너무나 고맙지만, 결코 반갑지 않은 그가 날 찾고 있다. 살다 보면 그런 존재, 그런 관계, 그런 상황들이 있지 않던가. 불길한 예감이 실려 집어 드는 핸드폰이 무겁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의연하고 차분했다. 한 학년 내내 줄기차게 선생님을 괴롭혔던 말썽쟁이가 또 사고를 쳤다. 나는 습관처럼 죄인 된 심정으로 머리를 조아리며 용건을 전해 듣는다. 이번 사건은 같은 반 친구랑 벌인 주먹다짐이다. 서로 조금씩 다쳤으나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사려 깊은 선생님은 학부모 안심시키기를 빠뜨리지 않는다. 둘을 데리고 막 병원으로 출발하려는 참인데 올 수 있겠느냐고 묻는.. 2022. 2. 19.
00. <아무나가 아니라 ‘내’가 되고 싶어> 연재 예고 되는 일이 없을 때 읽으면 용기가 되는 이야기 “언젠가 희망 없이 털썩 주저앉아 있을 때 내 이야기를 떠올리며 의지와 희망으로 툭툭 털고 일어난다면 이 책은 그 역할을 다한 것이다.” 작가 하주현은 우연히 호텔 로비 피아니스트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것을 계기로 리츠칼튼 호텔 서울, 미국 플로리다, 펜타곤 시티, 호주 시드니와 미슐랭 3스타 셰프들의 레스토랑 뉴욕 다니엘, 르 버나딘, 라틀리에 드 조엘 로부숑에서 근무했다. 영어를 잘 못하는 작가는 의사소통 문제로 곤란하거나 억울한 상황을 겪기도 하고, 때로는 인생의 갈림길에서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는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라는 생각으로 꿋꿋하게 일어나며 ‘아무나’가 아니라 세상에 하나뿐인 ‘나’로서 삶을 살아간다. 『아무나가 아니라 ‘내’가 .. 2022. 2. 18.
04. 보이후드 영화 는 로 익숙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작품이다. 2015년 1월 신촌의 작은 극장을 홀로 찾아 처음 이 영화를 보았다. 오전 첫 회차인 조조 상영이라 관객은 두엇뿐이었다. 바깥이나 극장 안이나, 날씨도 분위기도 을씨년스럽기가 하나같았다. 그러나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세상은 두 시간 전에 비해 훨씬 푸근했다. 마음 한편에 보드랍고 말랑한 감정들이 몽글몽글 덩이지는 걸 느꼈다. 독특하고 새로웠다. 새해 벽두였지만 조급하게도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올해 최고의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먼 훗날 인생영화를 꼽더라도 가뿐하게 베스트10 안에 들지 않을까! 한두 달 동안은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게 이 영화를 꼭 봐야 한다며 영업을 하고 다녔다. 는 평단으로부터 받아 낸 융단 호평으로도 유명하다. 한 영화평론가.. 2022. 2. 18.
03. 순수의 기원 열다섯 살, 말 안 들어 먹는 건 국가대표급이고 갈수록 제멋대로이기만 한 사춘기 소녀 로사. 그런 로사를 아직도 아빠는 가끔 “아가야!”라 부른다. 언젠가 혹자 하나는 그걸 듣고는 지청구를 놓았다. “아니, 얘가 어떻게 아직도 아가야?” 모르는 소리 하고 있다. 경솔하게 입 밖에 내서 좋을 게 없는, 그야말로 모르는 소리다. 딸이 없어 불행한 자가 요량 없이 뇌까린 말에 대꾸는 해서 무엇 하나. 대체 나이가 무슨 소용? 아빠에게 딸내미의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영원한 아가가 있다는 기쁨을 어찌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있을까! 가족 내부에서도 민원이 접수된 적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미카엘 군의 의견이었다. “로사가 지금 몇 살인데 아직도 아가라고 불러요?” 여동생이 여전히 아가인들 오빠로서 별 손해 볼 .. 2022.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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